5·18단체 "계엄군 항쟁 후 행적까지 전반적으로 재조사해야"

5·18 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 시신이 항쟁 종료 뒤 제2의 장소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커 계엄군 행적에 대한 전반적인 재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5·18행불자 시신은 양민학살 증거…계엄군이 옮겼을 가능성 커
19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공개된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 회의록 등을 보면 계엄군은 1980년 5월 21일 금남로 집단발포 후 광주 외곽으로 후퇴해 주둔지 여러 곳에서 양민학살을 자행했다.

계엄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은 12·12 및 5·18 사건 검찰 수사 때도 밝혀졌는데 주남마을 사례가 대표적이다.

주남마을 사례는 광주에서 전남 화순으로 향하던 17인승 소형버스에 가해진 무차별 사격으로 10명이 숨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11공수여단 62대대 병력은 살려달라며 울부짖던 부상자 2명을 야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하기도 했다.

계엄군은 송암동에서 11공수와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 간 벌어진 오인 교전으로 병력 9명이 사망하자 화풀이 삼아 주변 일대를 수색해 시민 5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군은 민간인 3명을 대검으로 찌른 뒤 M16 소총으로 확인 사살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계엄군은 양민학살 현장에서 '살인 증거'인 시신을 암매장했다.

일부는 가족에 의해 발굴됐고 나머지는 소재가 불분명하다.

양민학살이 광범위하게 자행돼 행불자 숫자 또한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시 외곽 계엄군 주둔지뿐만 아니라 도심에서 붙잡힌 민간인이 임시 구금당했다가 숨진 광주교도소, 전남대 등지에서도 암매장이 횡행했다.

5·18 유족회는 암매장과 관련해 계엄군이 집단학살을 자행한 다음 현장 주변에 시신을 임시 매장한 뒤 제2의 장소로 옮겼을 가능성을 줄곧 제기해왔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성과 없이 끝난 암매장지 발굴조사는 이러한 유족회 주장에 힘을 보탠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면담보고서에는 항쟁이 끝나고 광주를 떠난 11공수 병력 일부가 일반 보병 복장을 하고 광주로 돌아와 임시매장지 발굴 작업을 했다는 증언이 등장한다.

전남대 5·18연구소가 1989년 수집한 증언에서도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7공수여단 병력이 6월 중순까지 광주에 머물며 뒷수습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5·18기념재단이 3공수여단 부대원이 작성한 메모를 토대로 행방불명자 발굴 준비에 들어가면서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행적에 대한 전반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양래 5·18재단 상임이사는 "5·18 당시 광주에는 20여개 부대가 투입됐다"며 "항쟁 이후까지 이들 부대의 작전일지가 완벽하게 공개돼야 행불자 소재를 파악하는 작업이 헤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연합뉴스) 정회성 기자 h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