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멀고도 아득한…고요함이 만들어낸 푸르른 파도소리…나그네도 떠난 이도 그리워하는…고향의 섬, 영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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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3> 국립공원 명품 섬 신안 영산도
<3> 국립공원 명품 섬 신안 영산도

![[여행의 향기] 멀고도 아득한…고요함이 만들어낸 푸르른 파도소리…나그네도 떠난 이도 그리워하는…고향의 섬, 영산도](https://img.hankyung.com/photo/201707/01.14361131.1.jpg)

영산도는 느낌이 참 밝고 화사하다. 서남해 섬들이 대체로 잿빛인 데 비해 영산도 바다는 푸르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섬이 작으니 흑산도에서 건너온 집배원은 행낭도 없이 우편물 몇 개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배달한다. 마을 앞바다에서는 노부부가 다시마를 가득 실은 거룻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노인이 힘겹게 노를 저어 거룻배를 해변에 댄다. 노부부는 거룻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려 애쓰지만 두 노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다. 노인은 정자 그늘에 쉬고 있는 마을 사람을 부른다. 정자에 있던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배를 함께 끌어준다.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다.
항간에는 나주 영산포나 영산강의 이름이 영산도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고려 말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의 삼별초 왕국에 동조했던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킨 공도정책이 있었다. 이때 흑산도와 영산도 등의 주민들도 나주 땅 남포강(영산강)변에 수용되면서 영산현이 생겼는데 그 이름의 연원이 영산도라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근거는 없다. 더 큰 섬인 흑산도를 놔두고 굳이 작은 섬 영산도에서 현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단정하기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영산도는 지금 30여 가구가 살지만 1960년대에는 100여 가구 1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섬이다. 예전에는 액기미라는 작은 마을도 하나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된 지 20년이 넘었고 큰 마을인 영산리 하나만 남았다. 액기미는 ‘뒷고을’이라고도 했는데 액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액기미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옛날 액기미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어 학교에 다녔다. 외딴 마을이 싫어 액기미 사람들은 큰 동네에 넘어와 살고 싶어 했다. 큰 동네 사는 이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큰 동네에 빈집이 나오면 바로 샀다. 촌에 산다고 액기미 아이들은 큰 마을 사는 친구들한테 무시도 당했다. 뭍에서 보면 다 같은 낙도일 뿐인데 작은 섬에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영산도 당집에는 처녀신 모시고 있어
마을길을 돌아 당산에 오른다. 석주대문, 문암귀운 등이 포함된 영산도 팔경 중 첫째가 당산찬송이다. 물론 팔경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근래에 만든 것이다. 요즈음은 어디나 다들 팔경이란 이름을 붙여서 홍보한다. 더러 십경이나 십이경도 있지만 대다수는 팔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팔경일까. 대한팔경, 관동팔경 같은 팔경의 원조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하필 팔경인 것은 주역의 8괘와 연관이 있다. 춘하추동 4계절에 명승지를 음양으로 두 개씩 배정해서 팔경으로 정한 것이다. 소상(瀟湘)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의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이 노래해 왔다. 소상팔경의 전통이 하나의 미학으로 확립된 것은 북송 때 화가들이 소상팔경도를 그리면서부터다. 이후 동북아에서 소상팔경은 관념산수 시대 최고의 미학이 됐다. 영산팔경 또한 소상팔경에서 비롯됐다.


당집에는 당할아버지도 모시지만 신의 존영은 처녀신인 소당애기씨만 있다. 할머니는 정작 자신의 마을 신전인 당집에 어떤 신이 있는지도 잘 모르신다. 그만큼 두려운 곳이 당집이니 알려고 하지 않으셨던 게다. 평생 섬에 살았지만 당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당제를 모시는 것 또한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은 남자들뿐이라 더 그렇다. 섬 주민들의 전통 신에 대한 외경은 여전하다. 먼 바다 섬, 늘 사나운 파도와 태풍의 위협에 시달리니 더 그러할 것이다. 당산은 본래 초가였는데 낡아서 주저앉아버리자 서울 향우회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해 줬다. 영산도 당은 흑산도 최고 당인 진리 당의 분당이다. 진리 당에서 처녀 신을 모셔다 건립했다. 영산도 당의 소당애기씨가 흑산도 진리 당의 그 영험하다는 처녀 신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 작은 섬에서 3년에 한 번씩은 꼭 소까지 잡아서 바치며 당제를 지냈을 정도로 당은 절대적인 신앙의 성지였다.

예전에는 홍어잡이 요즘은 멸치



![[여행의 향기] 멀고도 아득한…고요함이 만들어낸 푸르른 파도소리…나그네도 떠난 이도 그리워하는…고향의 섬, 영산도](https://img.hankyung.com/photo/201707/01.14361135.1.jpg)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