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퀄컴의 독점적 구조를 그대로 두면 사물인터넷(IoT), 5세대(5G) 이동통신도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이 될 것입니다.”

14일 공정거래위원회와 퀄컴 간의 소송전이 펼쳐진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윤성원) 재판정. 공정위 대리인으로 나선 법무법인 KCL의 서혜숙 변호사가 퀄컴의 불공정한 특허 계약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서 변호사는 “퀄컴이 공정위의 시정명령을 곧바로 이행한다고 해도 사업 모델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공정위와 퀄컴이 1조원대 과징금과 시정명령 이행을 놓고 본격적인 법적 다툼을 시작했다. 이날 재판은 퀄컴이 공정위를 상대로 신청한 시정명령 집행정지(효력정지)의 공개 심문이었다. 이날 심문에서는 퀄컴의 이른바 ‘특허 갑질’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애플 삼성전자 인텔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업체들도 연합전선을 펼쳤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퀄컴에 통신표준특허 남용 등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시정명령과 함께 역대 최대 규모인 1조300억원의 과징금 처분을 내렸다.
삼성·인텔·애플 등 공정위 지지

퀄컴은 법무법인 세종·화우·율촌을, 공정위는 KCL·최신법률사무소 등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보조 참가자인 삼성전자(광장·태평양), 애플(태평양), 인텔(지평) 등도 각각 대형 로펌을 법률 대리인으로 선임했다.

퀄컴 대리인으로 나선 법무법인 화우의 윤호일 변호사는 “공정위의 시정명령은 퀄컴의 사업구조를 전부 바꾸라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매우 과격하고 전면적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윤 변호사는 “공정위의 시정명령 처분은 일단 실행되면 되돌릴 수 없고, 회복이 불가능한 중대한 피해”라고 했다.

반대 측의 공세는 거셌다. 애플 측 대리인은 “퀄컴이 본안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퀄컴은 칩셋 공급을 조건으로 휴대폰업체에 부당한 라이선스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퀄컴은 이른바 ‘퀄컴 택스(세금)’를 부과하며 통신업계에 무임승차해왔다”고 비판했다.

인텔 측 대리인은 “퀄컴은 그동안 인텔이 칩셋을 거래하려는 것을 방해해왔다”며 “퀄컴이 보유한 표준필수특허(SEP)를 인텔의 요구에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퀄컴이 통신칩셋을 판매하면서 칩셋(부품)에만 특허료를 매긴 게 아니라 휴대폰 가격을 기준으로 로열티를 챙겨왔다”고 지적했다.

퀄컴 대리인으로 나선 이준상 화우 변호사는 “퀄컴의 통신칩셋은 단순히 부품이 아니라 휴대폰 전체를 구동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라며 “휴대폰 값을 기준으로 로열티를 받은 것은 업계의 관행이었다”고 반박했다.

삼성 모뎀칩 외부 판매도 막아

공정위는 퀄컴이 표준필수특허를 무기로 1993년부터 삼성전자에 ‘모뎀·통합칩셋 외부판매 금지’란 족쇄를 채워왔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 대리인은 이날 “퀄컴에 라이선스를 요구했지만 퀄컴 측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모바일 통합칩셋 ‘엑시노스’를 개발했지만 자사 휴대폰에만 공급하고 외부에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 대리인은 “앞으로 1~2년은 본격적으로 5G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시정명령이 신속히 이행되지 않는다면 5G 시장에서도 퀄컴이 대부분의 이익을 가져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고법은 이날 심문을 바탕으로 퀄컴이 신청한 효력정지 인용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다. 재판부가 퀄컴의 주장을 받아들여 효력을 정지한다면 본안소송 결과가 나오기까지 퀄컴은 종전 방식의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효력정지 신청이 기각될 경우엔 휴대폰·칩셋 업체와 대규모 재협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안정락/이상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