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하사헌 기자 = 6·25전쟁 당시 영하 40도의 극한 추위 속에 미해병 1사단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제임스 웨렌 길리스씨가 25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UN 참전국 전사자 명비에 헌화한 후 경례하고 있다. 2017.6.25
toadboy@yna.co.kr/2017-06-25 15: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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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엔 유통기한 없어…자유수호의 전쟁, 반드시 잊지 말아야”



미 해병 1사단 소속으로 파병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등에 참가

“전쟁은 탐욕의 산물…일으키는 자와 희생자는 언제나 달라”



“6·25전쟁이 터진 후 한국에 파병됐을 땐 한국이란 나라의 이름과 위치조차 몰랐어요.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야 한국이 어떤 곳인지 알았고, 전쟁터 한가운데에 왔음을 실감했죠. 끔찍한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 군인 중 한 명이란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지난 23일 서울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서울 호텔에서 만난 6·25전쟁 참전 용사 제임스 워런 길리스 씨(87.사진)는 이같이 말했다. 미국 해병 1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그는 6·25전쟁 중 가장 극적인 순간으로 알려진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에 모두 참가했다.

길리스 씨는 미 해병대 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된 장진호 전투에 대해 회상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 12만명의 매복 인해전술에 휘말려 17일간 벌인 전투를 말한다. 길리스 씨는 “그 때 우리 군(미 해병)은 1만3000명 정도 됐는데, 전투가 끝난 뒤엔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빼고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이 1500명 정도밖에 안 됐다”며 “영하 30~40℃의 혹한을 뚫고 전투장비와 전우들의 시신을 운반하며 산길을 헤맸다”고 말했다. “끔찍했죠. 하지만 그 많은 중공군들 앞에서도 우리 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길리스 씨는 1951년 미국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꾸려 갔다. 그는 “전쟁의 기억이 날 괴롭힌 적은 없었으며, 전쟁 이후엔 새 삶을 다시 이어가면 되는 것이었다”면서도 “가끔 전장에서 죽은 벗들이 떠올랐고, ‘왜 내가 살아남았을까’란 질문이 오래도록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에 대해 “전쟁은 탐욕이 빚어낸 비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전쟁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그런 처지에 처했는지 몰라요. 이유를 알 방법도, 그걸 찾을 겨를도 없어요. 하루 하루 살아내야 하니까요. 전쟁을 일으키는 탐욕과 전쟁을 몸으로 겪는 희생자들의 운명은 언제나 엇갈려요.”

또 “우리가 이름도 모르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음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길리스 씨는 “지금도 손녀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자주 한다”며 “‘아주 먼 나라에 가서 그 곳 사람들과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하면 손녀는 그걸 마치 동화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내가 죽어도 나의 이야기는 우리 집안에 자랑스럽게 남을 겁니다. 난 내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아요. 그리고 한국인들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아마 전쟁 이후 세대들은 모를 겁니다.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죽었는지 말입니다. 이젠 그 사람들 모두 내 나이 또래가 됐겠지요. 사람의 목숨엔 기한이 있지만, 기억엔 유통기한이 없어요.”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