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패션계 전설 '기술의 습격'에 무릎 꿇다
미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밀러드 드렉슬러 제이크루 회장(72·사진)이 5일(현지시간) 전격 사퇴했다. 아마존 등 기술 기업의 도전과 패션산업 변화를 과소평가했다는 자책과 함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내놓기로 한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드렉슬러 회장이 이사회 의장 자리를 유지한 채 파산을 피하기 위해 20억달러(약 2조2400억원)에 달하는 채무재조정 작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후임에는 가구회사 웨스트엘름의 제임스 브레트 사장이 선임됐다.

10분기 연속 매출 감소

제이크루는 미국의 대표적인 중가 의류 브랜드다. 1983년 카탈로그 의류판매 회사로 출발했다. 고가 의류 브랜드인 랄프로렌을 겨냥해 고급스런 디자인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인기가 급상승했다.
미국  패션계 전설 '기술의 습격'에 무릎 꿇다
한때 8000만 장의 카탈로그를 발송해 주문을 받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각종 행사나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입고 나오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89년 뉴욕 맨해튼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 46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제이크루는 그러나 의류판매 시장이 온라인으로 재편되고, 저가의 패스트패션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흐름에 대처하지 못하면서 어려움에 빠졌다. 2011년 사모펀드인 TPG캐피털과 레오나드그린앤파트너가 30억달러에 인수했다.

제이크루는 최근 2년간 과도한 부채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과 함께 매출 및 브랜드 가치 감소로 고전했다. 지난해 의욕적으로 시작한 신부복 사업도 올 들어 중단했다. 지난 4월에는 회사에 26년간 몸담아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나 라이언스 사장이 오는 12월 계약 만료와 함께 떠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본사 인력 150명을 감축하는 구조조정 계획도 내놨다. 제이크루의 동일점포 매출은 10분기 연속 줄었다.

“1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2003년 제이크루 CEO로 영입된 드렉슬러 회장은 1990년대 패션회사 갭(GAP)에서 일하며 이름을 날렸다. 갭, 올드네이비, 바나나 리퍼블릭, 메이드웰 등의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키워내며 패션업계 ‘미다스의 손’이란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제이크루에서도 디자이너가 제작한 고급 의류를 대중에게 판매한다는 전략을 구사해 초반에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WSJ는 “수십년간 패션산업은 1년 전 미리 옷을 디자인해 제작한 뒤 예측이 적중하느냐에 따라 대박과 쪽박이 갈리는 비즈니스였다”며 드렉슬러 회장의 경영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하이테크 기술 도입으로 실시간 공급망 관리가 가능해지고, 소비자 반응을 즉각 반영해 디자인과 생산이 수주 내로 이뤄지면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통하지 않게 됐다. 온라인 시장의 부상은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고,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가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 됐다. WSJ는 “게임의 규칙이 과거 제품과 디자인에서 속도와 가격으로 바뀌었지만 제이크루의 대처는 늦었다”고 꼬집었다.

드렉슬러는 지난달 WSJ와의 인터뷰에서 “기술 발전이 초래할 의류소매업의 지각변동을 과소평가했다”며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시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시장의 흐름을 외면한 채) 지나친 엘리트주의로 흘렀다”고 실토하면서 “디지털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소비자가 접근하기 쉬운 이미지를 제공하겠다”고 재기 의지를 밝혔지만 불명예 사퇴로 끝을 맺었다.

저서 《혁신기업의 딜레마》로 유명한 클레이턴 크리스턴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현재 고객의 요구를 충족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현직 CEO는 새로운 변화의 도래를 감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기존 시장을 파괴할 수도 있는 신기술의 도입은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꺼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