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舊)체제 청산’을 뜻하는 프랑스어 ‘데가지즘(dégagisme)’의 원산지는 북아프리카 튀니지다. 튀니지인들이 2011년 독재자 벤 알리 퇴진을 요구하며 ‘아랍의 봄’ 시위에 불을 댕겼을 때 외친 구호(dégager: 물러나라)에서 유래했다.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쓰러뜨린 타흐리르 광장 시위 때도 ‘데가지즘’이 등장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아랍의 봄’은 권좌의 주인만 바꿔놓았을 뿐, 북아프리카 국가들은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로 돌아갔다.

‘데가지즘’이 다시 구호로 등장한 건 엊그제 끝난 프랑스 대통령 선거였다. 국회 의석이 단 한 석도 없는 신생 정당의 서른아홉 살짜리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결선 투표에서 그와 맞대결을 벌인 마린 르펜도 의석이 단 두 석뿐인 소수당(극우정당인 국민전선) 대표다. 60년 넘게 양당 구도를 유지해 온 공화당과 사회당 후보들은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현직 대통령인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는 지지율이 4%로까지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연임 도전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파이낸셜타임스의 논객 마틴 울프는 10일자 칼럼에서 ‘잃어버린 10년(a lost decade)’이란 표현을 썼다. 프랑스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이 2007년 수준과 같았던 걸 빗댔다. 이웃나라 독일은 같은 기간 동안 7% 성장했다. 프랑스가 성장을 멈춘 10년의 결과는 참혹하다. 실업률이 10.1%(3월 기준)로 독일(3.9%)과 영국(4.5%)의 두 배를 넘는다. 25세 미만 청년층 실업률은 23.7%로 독일(6.7%)의 세 배를 웃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수준의 성적이나마 지속가능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프랑스 GDP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한 비중은 56%(IMF 통계)에 달한다. 세계 6위의 거대 경제를 계속해서 재정으로 떠받치려면 엄청난 세금 징수가 필요한데, 불가능한 일이다. 프랑스는 순공공채무(작년 말)가 GDP의 88%로 독일(45%)의 두 배에 가까울 만큼 이미 거대한 빚더미 위에 올라 있다.

현실을 외면한 ‘낭만적인’ 정책이 비극의 출발이었다. 사회당이 집권했던 2000년 프랑스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를 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며 주35시간 근로제를 도입했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1인당 고용비용이 늘어나자 기업들이 채용 자체를 기피해버렸다. 정규직 노동자 해고를 어렵게 만든 법규까지 더해져 일자리는 오히려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전개됐다.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노·사·정 합의를 통해 고용유연성을 높이는 노동개혁을 성공시켰다. 이웃한 두 나라가 성장률과 실업률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된 건 전적으로 정치적 선택과 처방의 결과였다.

사회당과 번갈아가며 집권해 온 공화당도 무능하고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조 등 기득권 세력을 설득해서 개혁을 밀어붙이기는커녕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국고 횡령 같은 스캔들만 일으켰다. 기성 정치판에 진절머리가 난 프랑스인들이 대통령 선거전 초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수입해 오자”는 만화 같은 온라인 청원운동(obama2017.fr)을 펼치더니, 30대 젊은이의 정치실험에 나라 운명을 맡기기에 이른 배경이다.

올랑드 정부에서 경제장관을 맡았던 마크롱은 공공부문 일자리를 12만개 없애는 대신 민간 일자리 확대를 지원하고, 법인세를 33.3%에서 25%로 낮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근로시간 확대 등 근본적인 노동개혁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단맛’에 중독돼 버린 노조는 마크롱이 경제장관 시절 노동유연성을 높이는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하자 살해 협박을 한 끝에 저지해 버렸다. 프랑스가 겪고 있는 정치적 진통은 잘못 들어선 길을 되돌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데가지즘’ 이후의 프랑스가 궁금해진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