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지키는 게 아니라 이용해 먹는 것"
독일 철학자 칸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근본악(radical evil)’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은 누구나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을 하는데, 이것이 도덕의 법칙보다 우선해 어느 순간 사악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누군가를 미워하는 성향도 근본악의 범주에 있다.

SBS 미니시리즈 ‘귓속말’에는 칸트가 말한 근본악의 화신인 법비(法匪)들이 대거 출몰한다. 법비는 법을 악용해 이익을 취하는 무리들을 일컫는 신조어다. 이동준(이상윤 분)은 법비들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대법원장의 사위에게 소신껏 징역형을 구형한 올곧은 신념의 판사다. 하지만 “인생 쉽게 산 놈들 벌주겠다”고 앞장서 온 동준도 수백 명의 변호사와 100여명의 고문을 거느린 법률회사 태백의 최일한 대표(김갑수 분)가 친 올가미에는 속수무책이다.

최일한은 방산비리를 캐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기자 관련 사건에 대해 “방송국 해직 기자인 신창호(강신일 분)를 유죄로 판결해달라”고 동준을 회유한다. 그렇게 하면 동준을 자신의 딸 최수연(박세영 분)과 결혼시켜 태백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속삭인다. 동준은 신창호의 딸 영주(이보영 분)가 제출한 증거로 신창호의 무죄를 확인했지만 끝내 잘못된 판결을 내리고 만다.

동준에게 복수하기 위해 태백에 잠입한 영주는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 수집에 나선다. 결국 태백에서 최수연과 그 내연남인 강정일(권율 분)이 살인사건의 진범임을 확인한다. 동준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영주의 추적을 방해한다. “다들 마음을 바꾸니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해온 ‘신념의 판사’ 동준이 법비가 되는 순간이다.

소신껏 비리를 밝히고 서민의 편에서 취재해 온 신창호는 억울하게 15년형을 받았음에도 ‘죄는 키울 수 있지만 없는 죄는 못 만든다’고 믿는다. 그에게 세상은 여전히 정의가 숨 쉬는 곳이다. 아버지의 신념을 위해 하루빨리 진범을 밝히려는 영주에게 동준은 “기다리라”고 말한다. 영주는 “기다려라. 가만히 있어라. 그 말 들었던 아이들은 아직도 하늘에서 진실이 밝혀지길 기다리겠죠”라며 절규한다. 시대의 아픔에 숙연해지는 대목이다.

동준은 혼돈에 빠진다. 자신의 인생이 소중해서 선택한 한 번의 변절이 눈덩이처럼 커져서다. ‘박탈감을 느끼지 못하게 하면서 서민들을 박탈하는 것’이 임무가 된 자신이 혼란스럽다. 병원장인 아버지 이호범(김창완 분)은 동준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뭘 버려야 할지, 뭘 남겨둬야 할지 결정해”라고.

한때 소신파 판사였던 동준은 ‘힘없는 정의를 버리고 정의 없는 힘’을 선택한 대가를 혹독히 치른다. 조폭 두목에게조차 “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용해 먹는 것”이며 “법을 구워도 먹고 삶아도 드시는 분”이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동준은 이윽고 영주가 확보한 증거를 스스로 없애도록 해 또다른 변절자를 양성한다.

악의 중심에서 혼돈에 빠진 동준과 영주가 회생할 길은 없는가? 헤겔은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인간은 자기모순에 빠진 상황에서 경험을 쌓으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다고 했다. 드라마 제목 ‘귓속말’이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신념에 반하는 편향된 무의식은 아닐까?

신념과 정의가 있는 삶이 당연하다 여긴 동준과 영주가 변절의 고통을 딛고 권력과 비리에 임하는 노련함은 어떤 합으로 구현될까. 반전의 반전으로 정형성을 벗어나려는 박경수 작가의 몸부림이 앞으로 두 캐릭터에 어떻게 녹아들지 궁금해진다.

이주영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