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현재 오키나와는 일본국의 현(縣)이지만 19세기까지는 국왕이 다스리던 유구(琉球) 왕국이었다. 유구국은 1872년 일본에 복속돼 유구현이 됐고, 얼마 후 오키나와현이 됐다.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던 무렵이다.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현립박물관에서 ‘유구와 오키나와의 지도전’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었다.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유구국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 역사와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했다.

유구는 10세기가 돼서야 선사시대가 끝났고, 14세기 말 명나라와 국교를 맺었다. 유구의 국왕은 명나라 황제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당시 조선의 국왕이 명나라 황제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유구는 중국으로 꾸준히 유학생을 보냈지만, 조선은 유학생을 보내려 해도 중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국에서 공부한 유학생은 양국의 무역을 주도했고, 지금도 오키나와에는 중국계 후예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중국 문화를 지키고 있다.

조선은 15세기에 유구국과 국교를 맺고 사신을 교환했다. 현재 슈리성(首里城)이라 불리는 왕성 근처에 조선 국왕이 선물한 대장경을 보관했던 건물이 남아 있고, 박물관에서 조선 국왕이 보낸 국서와 유구국을 상세하게 소개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볼 수 있는 것도 조선과 유구가 친근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조선과 유구의 직접적인 교류는 사라졌지만 해상에서 표류한 주민들을 돌려보내는 간접 교류는 계속됐다.

유구는 17세기 초 사쓰마(薩摩)의 침입을 받은 뒤 일본으로도 사신을 보냈다. 사쓰마가 유구를 침입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유구가 군량미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파견된 유구의 사신은 사쓰마 번주의 중계를 통해 도쿄를 방문했다. 이는 조선 사신이 쓰시마(對馬島) 번주의 중계로 도쿄를 방문하던 것과 비슷했으며 일본 내지에서 조선과 유구의 사신이 이동하던 경로도 거의 같았다. 다만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관계에 있었고 유구와 일본은 상하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유구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쟁터가 됐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군정이 실시됐다. 미군정은 1945년부터 1972년까지 계속됐으며 이때는 유구 정부가 수립돼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미군정은 3년 만에 끝났지만 유구에서는 20년 가까이 지속됐고 미군정이 끝난 뒤에는 유구국으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 일본국의 오키나와현으로 복귀했다. 일본은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자마자 자위대를 배치했다.

오키나와는 50여개 섬으로 이뤄져 있으며, 산호초가 있는 푸른 바다와 해안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필자가 방문한 동안 한국 운동선수들이 그곳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고 해안 휴양지를 찾거나 골프여행을 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한국과 직접 관련 있거나 비슷한 점이 많아 반갑지만 어두운 역사가 많아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오키나와는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해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오키나와에 일본 해상자위대와 미군기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키나와는 독자적인 개벽신화가 있고 독특한 섬 문화를 가졌다는 점에서 제주도와 비슷한 점이 많다. 이참에 제주도와 오키나와현 혹은 제주시와 나하시가 교류 협정을 맺고 자주 왕래한다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김문식 < 단국대 교수·사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