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기업 활성화 위해선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 막고 혁신 기술 가치 제대로 평가해야
창업 성공 가능성 높이려면
초기부터 해외시장 공략하고 사업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어야
"벤처특별법 제대로 고치자"
벤처 인증 업무 민간에 넘기고 10년 한시법 아닌 영구법으로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52)은 “한국도 벤처 생태계를 제대로 구축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벤처 활성화는 정부 보조금이나 찔끔 줘서 될 게 아니다”는 이유에서다. 안 회장은 “사회 인프라 개혁이 우선돼야 한다”며 “모두가 벤처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2일 벤처기업협회 신임 회장에 취임한 그를 경기 성남시 판교 크루셜텍 사옥에서 만났다. 크루셜텍은 안 회장이 2001년 설립한 모바일 생체인증 전문기업이다.
▷벤처 생태계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기운 운동장부터 똑바로 하자는 겁니다. 중소·벤처기업의 70% 이상은 대기업에 납품해 매출을 올리지요. 대기업과의 상생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막고 공정거래의 올바른 관행을 확립해야 벤처 활성화도 가능합니다.”
▷지금도 불공정 거래 행위를 막는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있는데 잘 안 지켜지니까 문제죠. 이건 국가 의지의 문제입니다.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막도록 한 법과 제도를 체감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해요. 이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공정 경쟁을 위한 상거래 시스템을 확립하고 이를 꼭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합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있으니 바뀔 것으로 믿습니다.”
▷국내 벤처기업들이 혁신적 기술을 내놓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벤처기업가는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사람입니다.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것은 발명가의 몫이죠.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도 기존에 있는 것을 잘 조합하는 게 관건이에요. 애플이 잘하는 것도 기존 기술을 융합하는 것입니다. 애플은 기술이 필요하면 벤처기업을 산 뒤 기존 기술과 섞어요. 이를 위해 때론 수십억원짜리 중소기업도 인수합니다. 혁신적 벤처 육성을 말하기에 앞서 기술과 아이디어가 제대로 대접받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기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얘기인가요.
“한국에선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기업의 사업 확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론 벤처가 개발한 기술을 보는 시각 차이가 큽니다. 미국은 어떤가요. 애플, 구글 같은 기업들이 해마다 수백 차례 인수합병(M&A)을 합니다. 대부분 벤처기업입니다. 인공지능(AI) 바둑프로그램 알파고를 개발한 곳도 구글이 아니라 벤처기업입니다. 구글이 인수한 것이죠. 이런 M&A가 한국에서도 활성화된다면 청년들이 서로 창업하려 할 겁니다. 창업하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으니까요.”
▷인재들이 창업을 잘 하지 않는 것도 문제 아닙니까.
“서울대 하버드대를 나온 사람이 꼭 창업해야 하나요. 대기업 출신이나 교수들이 창업해서 망한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창업을 누구나 쉽게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누가 글로벌 기업을 일굴지 아무도 모릅니다. 알리바바를 설립한 마윈 회장은 영어 강사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창업의 씨를 많이 뿌리면 이 중에서 자연히 경쟁력 있는 기업이 나옵니다.”
▷창업하면 망한다는 부정적 인식도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업하다 실패하면 낙오자 취급하니 무서워서 창업을 못 하는 겁니다. 성실하게 사업하다 실패한 기업인에게는 재기 기회를 꼭 줘야 해요. 창업을 마치 프로젝트 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한다면 성공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무엇보다 금융 제도가 문제인데, 연대보증 폐지나 재기 기업인 지원 제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창업 후 회사를 일정 규모 이상으로 키우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 경영자의 자질이 부족하거나 정부 지원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미국 중국 등 경제 대국과 비교하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죠. 한국은 인구가 5000만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수시장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인구가 최소 1억명은 돼야 내수 기반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은 핸디캡을 안고 있는 셈이죠.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창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벤처기업협회도 그 역할을 해야겠군요.
“작년 말 국내 벤처기업의 수출을 돕는 무역 플랫폼인 글로벌벤처스를 열었습니다. 무역 코디네이터가 기업 수요에 맞는 서비스를 중개해 수출 판로를 개척해주는 사업입니다. 앞으로도 벤처 기업가들이 세계 시장으로 사업 기회를 넓힐 수 있도록 협회 사업을 꾸려나갈 계획입니다.”
▷벤처특별법 일몰이 올해 말로 다가왔습니다. 정부에 어떤 의견을 내고 있습니까.
“벤처 확인제도부터 바꾸자는 게 협회 입장입니다. 벤처는 기업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속성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기업을 대기업 취급하지 말고 벤처로 보자는 것이죠. 지금은 창업기업, 중소기업 위주로 벤처란 용어를 씁니다. 법도 그렇게 돼 있고요. 혁신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고 도전하는 벤처정신이 있다면 벤처기업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벤처 인증을 누가 할지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술보증기금 등 금융기관에서 기술평가를 받아 돈을 빌리면 벤처가 됩니다. 이걸 벤처기업협회 같은 민간 영역에서 확인하도록 바꾸는 것도 검토해야 해요. 매출 대비 연구개발(R&D) 비중 등 혁신성을 대표하는 지표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10년 한시법이 아니라 영구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번엔 100년 앞을 내다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영구법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정책이 세금 혜택이나 자금 투자를 통해 창업을 많이 늘리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벤처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전 과정을 지원하는 법이 돼야 합니다. 10년짜리 한시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창업 교육을 강조해 왔는데요.
“초·중·고교 정규 교육과정에서 기업가정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미국에는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기업가정신 연수 프로그램이 있어요. 일본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기업가정신을 가르치죠. 우리나라에선 그런 교육을 하려 하면 ‘장사꾼을 기르자는 것이냐’는 반대에 부딪힙니다. 기업가정신은 도전정신과 문제 해결 능력이에요. 기업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필요한 교육입니다.”
▷협회 임원 구성을 바꿀 계획은 없습니까.
“벤처기업협회가 창업 기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모두 아우르지 못 하는 게 사실이에요. 20~30대 청년이나 여성 기업인 등 다양한 배경의 기업인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들을 이사진에 참여시켜 다양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겠습니다.”
■ 안건준 회장은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2001년 크루셜텍을 창업해 작년 매출 약 3200억원을 올린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키웠다. 애플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세계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한 캐나다 블랙베리에 모바일 광마우스(OTP)를 공급하면서 급성장했다. 2011년 이후 블랙베리 인기가 꺾이면서 크루셜텍은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문인식 모듈(BTP) 개발로 다시 일어섰다. 중국 화웨이를 비롯해 대만 HTC, 일본 소니 등 글로벌 휴대폰 제조사들이 크루셜텍 부품을 쓰고 있다.
부산 출신인 안 회장은 직설적 화법을 구사한다. “아니면 아니다”고 말하는 스타일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지난달 열린 ‘4차 산업혁명 전략위원회’ 회의에서도 그랬다. “한국이 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졌다”는 우울한 얘기가 이어지자 안 회장은 “패배주의에 빠져선 아무것도 못 한다”고 일침을 놨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성공한다”며 “큰 일 할 분들이 왜 그러느냐”고 ‘돌직구’를 날렸다.이 자리에는 경제부처 장관과 대기업 회장 등이 있었다.
△1965년 부산 출생
△1991년 부산대 기계공학과 졸업
△1990년 삼성전자 기술총괄본부 연구원
△1997년 럭스텍 최고기술책임자(CTO)
△1998년 경북대 정밀기계학과 석사
△2001년 크루셜텍 설립
△2011년 월드클래스300 기업 지정
△2015년 벤처기업협회 수석부회장
△2017년 제9대 벤처기업협회 회장
안재광/조아란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