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는 멋진 런웨이…의상이 관객 사로잡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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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로 무대의상 도전한 1세대 디자이너 진태옥
옷으로 감정 변화까지 표현
패션쇼 같은 연출에 관객 탄성
후배 디자이너들도 참여 기대
옷으로 감정 변화까지 표현
패션쇼 같은 연출에 관객 탄성
후배 디자이너들도 참여 기대
지난 27일 그리스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대표작 ‘메디아’를 공연 중인 서울 명동예술극장. 타이틀롤을 맡은 이혜영이 새빨간 저지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나타나자 객석이 술렁였다. 마치 패션쇼 런웨이를 걷듯 등장한 그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혜영은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까지도 살해하는 메디아의 욕망과 그 욕망이 꺾였을 때의 분노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힘없이 흐물흐물한 소재의 의상은 모성까지 포기하고도 모든 것을 잃은 메디아의 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의상은 한국의 ‘1세대 디자이너’ 진태옥(83)의 작품이다. 그는 저명한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로부터 “진태옥의 옷은 한 편의 시(詩)와 같다”는 극찬을 받은 한국 패션계의 거목이다. ‘메디아’로 무대 의상에 처음 도전한 그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사실 대본을 받고는 망설였어요. 남편에게 배신을 당한 메디아가 아이들을 죽이는 게 너무나 잔혹하게 느껴졌거든요. 오죽하면 제 기도 제목이 ‘하나님, 제가 이 작품을 해도 될까요?’였으니까요.”
“드레스 리허설(무대 의상을 입고 실제와 같이 공연하는 총연습)에서 이혜영 씨가 의상을 입고 등장했을 때 ‘무대는 참 멋진 런웨이구나’ 싶었어요. 패션쇼 런웨이에서도 늘 주제를 정하고, 그 안에 기승전결을 가진 드라마가 있어야 하거든요. 메시지가 없으면 옷은 그냥 기능적인 옷일 뿐이죠.”
그는 1989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 갔을 때 현지 기자로부터 “진태옥,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의상에 담긴 너만의 철학과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의미였는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죠. 고심 끝에 ‘저들이 모르는 우리만의 것을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그는 순백의 달항아리처럼 미니멀한 디자인에 신사임당의 이야기를 입혔다. 남성복 옷감에 ‘초충도’를 자수하는 식이었다. 사대부집 여자들은 마당 안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꽃밭에 들어오는 나비와 벌, 방아깨비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상을 통해 표현했다. 그때부터 모시, 광목 등 우리 전통 소재에 민화를 손으로 자수한 디자인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는 2013년 국립극장에서 후배 디자이너 정구호가 매란국죽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표현해 올린 한국 무용 ‘묵향’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 정구호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이전의 전통 공연과 달리 미니멀하고 세련된 무대를 보자 “이건 외국에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980년대 파리에서 본 무용 공연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회색 홈스판 의상을 입고 배우들이 춤을 추는데, 환상적이었어요. 알고 보니 베르사체가 의상 디자인을 했더라고요. 우리도 이제 그런 공연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죠.”
이번 공연에서 보여준 그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의상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분노를 참는 교육을 받지 못한 오만한 왕녀 메디아는 검은 벨벳 드레스에 실크 망토를 쓰고 나온다. 메디아의 고통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쓰되 소재는 화려한 벨벳과 실크를 사용했다. 복수를 실행하는 장면부터 붉은 저지 드레스로 갈아입는다. 의상은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우리 공연이 세계로 뻗어나갈 때 의상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가 될 수 있어요. 더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이 공연 작업에 참여해 공연예술의 ‘정점’을 찍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 후배 디자이너들을 여럿 초대했어요, 하하.” 공연은 오는 4월2일까지,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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