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이 발의한 세제개편안
수출엔 면세·수입엔 세금 강화
WTO "국제통상 규정에 어긋나"
도입 땐 사상 최대 분쟁 불가피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 공화당 하원에서 추진하는 현금흐름 기반 국경조정세(DBCFT)와 관련해 EU가 유럽 내 무역업체들과 함께 WTO 제소 등 법적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14일 보도했다. EU 무역정책을 관할하는 이위르키 카타이넨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은 FT에서 “세계 경제에 ‘재앙’이 될 미국과의 무역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서도 “미국이 국경세 등 자의적인 무역장벽을 도입할 경우 그에 대응할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다”고 밝혔다.
◆소비자·수입업체는 반발
공화당 하원이 지난해 6월 선보인 세제개편안은 매출에서 각종 비용을 제하고 남은 ‘이익’에 과세하는 법인세 대신 현금수입에서 현금지출을 뺀 나머지 금액에 과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세율을 20%까지 떨어뜨리는 내용이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거 때 공약으로 제시한 감세(현행 35%인 법인세율을 15%로 인하)와는 조금 다르다.
공화당 하원안은 법인세라기보다 물건 판매수입에 세금을 물리는 변형된 부가가치세(VAT)다. 부가세는 최종 소비지역에서 과세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각국은 최종 판매 전 단계에서 낸 부가세를 환급해주고 있다. 다른 나라에 가서 팔겠다고 하는 수출은 당연히 부가세 환급(부가세 0% 적용) 대상이다.
변형된 부가세인 공화당 국경조정세도 이와 비슷하다. 수출업체는 미국이 최종 소비지가 아니므로 수출대금 전체에 대해 세금을 정부에서 환급받을 수 있다. 반면 수입업체는 자신이 창출한 부가가치나 벌어들인 이익이 아니라 판매가격 전체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한다. 문제는 국가 간 세금환급 고리가 촘촘히 연결돼 있어 서로 억울한 일이 덜 생기는 부가세와 달리 미국만 무역장벽을 목표로 변형 부가세 제도를 도입하면 다른 나라에서 인정을 못 받아 수입업자들이 억울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80만원짜리 제품을 수입해서 100만원에 판다고 할 때 차이(20만원)에 대해 과세하는 게 아니라 판매가격 전액(100만원)에 대해 20% 세율을 부과받을 수 있다.
데이비드 프렌치 미국소매연합(NRF) 로비스트는 이 제도 도입 시 수입 비중이 높은 소매업체가 내야 하는 세금이 “이익의 100%인 경우가 흔하고, 일부 사례에서는 이익의 두 배나 세 배를 세금으로 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입업체 중 상당수가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이유다. FT는 월마트, 나이키, 홈디포, 삼성전자 미국법인 등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다우케미칼, 제너럴일렉트릭(GE), 보잉 등 미국 수출업체는 이 구상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
◆WTO “용납할 수 없어”
세제개편안을 제안한 케빈 브래디 미국 공화당 하원의원(텍사스)은 “이 조치를 도입하면 일자리나 본사를 해외로 옮기는 모든 인센티브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거꾸로 말하면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낮은 법인세율로 조세피난처 역할을 해온 나라는 이 구상이 현실화되면 애써 유치한 미국 법인이 도로 자국에 돌아가는 모습을 봐야 할 가능성이 높다. 전문가들이 1920년대 이후 약 100년 만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오는 세제개혁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 법안이 도입되는 순간 대규모 무역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WTO 관계자는 이 방안이 용납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WTO를 탈퇴하지 않는 한 분쟁은 명약관화하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소속 WTO 분쟁 전문가인 채드 보운은 만약 미국이 세제개혁을 통해 수출을 촉진하는 보호무역조치를 했다가 “WTO 분쟁에서 패소하면 무역 보복으로 연간 3850억달러(약 440조원)의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방법을 채택할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멕시코 등에 대한 국경세 도입을 주장해온 그가 어떤 식으로든 보호무역적인 조치를 담은 세제개편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