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를 이기는 도쿠가와 리더십(5) 경제력이 최종 승패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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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를 이기는 도쿠가와 리더십(5)
경제력이 최종 승패를 결정한다 1990년대 중반 출장으로 일본 땅을 처음 밟아봤다. 지난 20여년 동안 회사 업무로 일본에 두 차례 거주했다. 2007년 귀국 이후에도 매년 3,4회 정도 일본을 찾고 있다. 일본에 자주 다니다 보니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일본의 지방이나 산촌에서 한국과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산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국토에서 산악지역 비중이 높지만, 일본에도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3000m급 이상의 높은 산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산들이 우리나라 산보다 훨씬 가파르고 험준하다.
지역을 이동하거나 산골 마을을 넘어가려면 목숨에 위험을 느낄만큼 위험 곳도 적지 않다. 겨울에 눈도 많이 내려 전국 곳곳에 교통이 막히거나 며칠씩 고립되는 마을도 나타난다. 좁고 긴 국토, 험준한 산악지형 등이 일본의 국가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중세시대 일본에선 봉건제도가 존재했고, 지금도 지방자치제가 뿌리내리고 있다. 일본의 천연적인 지형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시대가 100여년 지속된 것도 험준한 산악에 위치한 영지가 곳곳에 분포돼 가능했다. 산촌을 다녀보면 높은 산의 중턱까지 쌀을 재배하는 논들이 많은 것도 눈길을 끈다.
전국시대에 ‘쌀’은 부의 상징으로 '권력'을 의미했다. 영주들의 세력 규모는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으로 비교됐다. 쌀을 많이 확보한 영주들이 더 많은 무사들을 고용하고, 보수를 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미곡 생산량이 군사력과 국력의 척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영주들의 연간 쌀 생산량은 50만~ 150만 석 규모였다. 전성기 시절(1586년) 오다 노부나가의 쌀 생산량은 245만 석에 달했다. 전국시대 통일의 문을 연 오다 노부나가의 ‘경제력’은 다른 대영주들과 비교해 3~4배 컸다.
전국시대의 패권을 잡기 직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쌀 생산량은 133만 석 정도. 게다가 도쿠가와는 에도로 영지를 옮기면서 영지내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금, 은 광산을 많이 보유해 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게 일본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권력(정권)을 잡으려면 돈이 들어간다. 튼튼한 경제력이 집권의 기본이 된다는 뜻이다. 경제력이 강한 자가 결국 패권을 쥐게 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전국시대의 영주들은 생산력 증대에 경쟁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유능한 다이묘들은 모두 농산물 생산과 기술 개발에 열중했다. 일본에서 제조업이 융성하고,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된 뿌리는 중세시대의 영주간 경쟁 덕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도쿄)로 영지를 옮긴 뒤 경제력 확충에 힘을 쏟았다. 습지와 갈대밭으로 버려져 있던 에도의 많은 땅이 간척과 농지 개발로 비옥한 옥토로 바뀌었다.
실제로 에도로 이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먼저 지시한 사업이 하천 정비였다. 이에야스의 가신인 다다쓰구는 제방을 쌓고 물길을 통일해 농민들이 관개를 할 수 있도록 보와 용수로를 만들었다. 또 황무지와 습지를 개척해 농민을 이주시키고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다. 이에야스가 하천을 정비하고, 농지를 개간하자 간토(일본 동부 지역)가 최상의 세력 근거지로 탈바꿈했다. 간토 평야의 개간으로 이에야스는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녹봉미를 많이 지급할 여력을 갖게 됐다. 유능한 가신들을 많이 거느려 강한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검약에도 뛰어난 성품을 가졌다. 금,은의 생산량은 전국 영주 중 가장 많았으나 지출에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생산적인 일에 투자하고, 쓸데 없는 지출은 줄였다.
'부'를 지속적으로 장려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인 ‘경제 제일주의’의 정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된 밑거름이 됐다. 권력을 잡으려는 자는 먼저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최인한 한경닷컴 대표 janus@hankyung.com
경제력이 최종 승패를 결정한다 1990년대 중반 출장으로 일본 땅을 처음 밟아봤다. 지난 20여년 동안 회사 업무로 일본에 두 차례 거주했다. 2007년 귀국 이후에도 매년 3,4회 정도 일본을 찾고 있다. 일본에 자주 다니다 보니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일본의 지방이나 산촌에서 한국과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산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도 국토에서 산악지역 비중이 높지만, 일본에도 높고 험준한 산들이 많다.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3000m급 이상의 높은 산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산들이 우리나라 산보다 훨씬 가파르고 험준하다.
지역을 이동하거나 산골 마을을 넘어가려면 목숨에 위험을 느낄만큼 위험 곳도 적지 않다. 겨울에 눈도 많이 내려 전국 곳곳에 교통이 막히거나 며칠씩 고립되는 마을도 나타난다. 좁고 긴 국토, 험준한 산악지형 등이 일본의 국가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중세시대 일본에선 봉건제도가 존재했고, 지금도 지방자치제가 뿌리내리고 있다. 일본의 천연적인 지형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국시대가 100여년 지속된 것도 험준한 산악에 위치한 영지가 곳곳에 분포돼 가능했다. 산촌을 다녀보면 높은 산의 중턱까지 쌀을 재배하는 논들이 많은 것도 눈길을 끈다.
전국시대에 ‘쌀’은 부의 상징으로 '권력'을 의미했다. 영주들의 세력 규모는 영지 내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으로 비교됐다. 쌀을 많이 확보한 영주들이 더 많은 무사들을 고용하고, 보수를 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미곡 생산량이 군사력과 국력의 척도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영주들의 연간 쌀 생산량은 50만~ 150만 석 규모였다. 전성기 시절(1586년) 오다 노부나가의 쌀 생산량은 245만 석에 달했다. 전국시대 통일의 문을 연 오다 노부나가의 ‘경제력’은 다른 대영주들과 비교해 3~4배 컸다.
전국시대의 패권을 잡기 직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쌀 생산량은 133만 석 정도. 게다가 도쿠가와는 에도로 영지를 옮기면서 영지내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금, 은 광산을 많이 보유해 강한 경제력을 확보했다는 게 일본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권력(정권)을 잡으려면 돈이 들어간다. 튼튼한 경제력이 집권의 기본이 된다는 뜻이다. 경제력이 강한 자가 결국 패권을 쥐게 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전국시대의 영주들은 생산력 증대에 경쟁적으로 힘을 기울였다. 유능한 다이묘들은 모두 농산물 생산과 기술 개발에 열중했다. 일본에서 제조업이 융성하고,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된 뿌리는 중세시대의 영주간 경쟁 덕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도쿄)로 영지를 옮긴 뒤 경제력 확충에 힘을 쏟았다. 습지와 갈대밭으로 버려져 있던 에도의 많은 땅이 간척과 농지 개발로 비옥한 옥토로 바뀌었다.
실제로 에도로 이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먼저 지시한 사업이 하천 정비였다. 이에야스의 가신인 다다쓰구는 제방을 쌓고 물길을 통일해 농민들이 관개를 할 수 있도록 보와 용수로를 만들었다. 또 황무지와 습지를 개척해 농민을 이주시키고 새로운 마을을 조성했다. 이에야스가 하천을 정비하고, 농지를 개간하자 간토(일본 동부 지역)가 최상의 세력 근거지로 탈바꿈했다. 간토 평야의 개간으로 이에야스는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다이묘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녹봉미를 많이 지급할 여력을 갖게 됐다. 유능한 가신들을 많이 거느려 강한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검약에도 뛰어난 성품을 가졌다. 금,은의 생산량은 전국 영주 중 가장 많았으나 지출에 항상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생산적인 일에 투자하고, 쓸데 없는 지출은 줄였다.
'부'를 지속적으로 장려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인 ‘경제 제일주의’의 정책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된 밑거름이 됐다. 권력을 잡으려는 자는 먼저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최인한 한경닷컴 대표 jan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