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7일 저녁 7시.
사람 가득한 연말 홍대 거리를 지나, 서울 마포구 서교동 구석 작은 다락방에 들어섰다.

10평 남짓 다락방에는 주인장이 준비한 8개 의자가 둥글게 놓여 있었다. 퇴근을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의자를 채웠다. 모두 첫 만남. 낯선이와 눈이 마추칠까 애꿎은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화려한 창 밖 거리 풍경이 무색할 만큼 적막했다. 주인장이 침묵을 깼다.

“집단상담이라해서 너무 심각하게 있을 필요없어요, 호호.”
고민 있어 보이는 참가자 7명. 전문심리상담사인 주인장 진행 아래 주제나 형식도 없이 모임은 시작됐다. ‘명함을 꺼내지 않는다’는 규칙만 공지됐다. 이름, 나이, 직업 등 개인신상 공개는 금지다.

주인장은 “누구나 고민의 종류나 정도는 다르다”며 “각자 고민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자”고 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모두 주저했다. 주인장이 미소를 띄며 “처음보는 사람 앞에서 고민을 얘기하는게 당연히 힘들다”며 “누구나 살다보면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말 못 할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낯선 사람에게 받는 정서적 지지가 큰 위로와 힘이 된다고 단언했다.

주인장의 확신 때문인지, 온기를 밀어내는 난로 덕인지 사람들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각자의 사연은 주인장 바로 옆 남자부터 시계방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30대로 보이는 남자가 처음 꺼낸 말은 "외롭다" 였다. 사랑하던 연인과 헤어지고, 주변 친구들도 결혼을 하자 더 이상 만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불편함, 가식적인 대인관계에 더 외로워진다고. '혼남'(혼자 사는 남자)은 10여분간 자신의 처지를 토로했다.

남자가 말을 끝맺자 주인장이 대뜸 가족에 대해 물었다. "가족에게 느낀 외로움 탓 일지 모른다"고 했다.

남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망설이던 남자는 미간을 구긴 채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는 성인이 된 뒤 가족과 연락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유년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지는 구타를 일삼았다. 명문대에 진학했던 형제들에 대한 열등감, 청소년기 부모로 부터 받았던 차별과 멸시도 힘들었다. “이제는 괜찮다”고 이야기를 마쳤지만,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의 트라우마(지워지기 힘든 정신적 외상)는 가족이었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동안 몇몇이 눈물을 훔쳤다.

휴지를 건네받은 남자는 눈물을 보이진 않았다. 약 1시간을 자기 상담에 써서 연신 미안하다고 말했다. 예정된 모임은 3시간이었다. 주인장은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다. 당신 얘기가 우리 얘기”라 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이 남자에게 해줄 말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 한 여자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다른 아픈 가정사를 희뿌연 담배 연기처럼 토해냈다.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았고, 일찍이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뒤 남자처럼 부모와 연을 끊었다.

주인장이 앞으로도 부모를 만니지 않을거냐 물었다. 몇달 전 5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약속날 마저 술에 취해서..."에서 울음이 터졌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손에 쥔 휴지를 여자에게 전했다. 모두 말없이 그들을 바라봤다. "힘내라", "괜찮다"는 요식적인 말은 하나도 없었다. 조언이나 충고는 더더욱 없었다.

짧은 적막 끝에 여자는 울음을 그쳤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남자도 구겨진 미간을 풀었다.

주인장이 처음 말한 "당신 얘기가 우리 얘기"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됐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누군가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봤다. 다시 말하지만 "힘내라", "괜찮다"는 요식적인 말은 없다, 조언이나 충고는 더더욱.
가정사뿐 아니라 왕따, 이혼, 번아웃 등 다양한 고민들이 나왔다.

다른 여자는 성인이 된 지금도 학창시절 왕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울음부터 터졌다. "힘내라", "괜찮다" 대신 다들 모두 조용히 기다려줬다. 5분 뒤 얘기를 이어갔다. 감수성 풍부할 중학교 때 겪은 아픔이었다. 3년간 지속됐던 괴롭힘과 폭력, 알면서 방관했던 교사까지. 지금도 악몽을 꾼다는 고백에 몇몇은 고개만 끄덕였다.

주인장이 왕따를 당해 본 사람을 찾았다. 7명 중 3명이 손을 들었다. 어릴적 당한 왕따부터 직장 내 왕따까지 각자 담담히 털어놨다.

주인장은 여자의 손을 잡았다. 도망가지 않고 아픈 기억을 마주한 점을 칭찬하며 말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사는게 힘들어 죽거나 잠적한다.
살아가고 있는 자체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기자도 난생 처음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얘기를 꺼내는 건 쉽지 않았다. 기자도 취준생 시절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던 때를 떠올렸다. 하루하루가 불안하던 시기였다. 늘 성취에 목이 말랐다. 칭찬은 무언가를 이룰 때 비로소 받는 거라 생각했다. 주인장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돌아보면 미약했던 그 시간도 칭찬받아 마땅했다.

1년 간 짧은 결혼 생활 후 이혼한 여자가 전해준 이별 얘기도, 직장 생활이 불행하다는 40대 남성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회초년생도 같은 시간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모임에 정신분석학적 전문 용어나 처방은 없다. 참석자 저마다 아픔과, 그 아픔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모임은 예정보다 2시간 넘긴 자정에야 끝났다. 다음날 출근해 피곤할 몸보다, 오늘 마음 속 짐을 덜어낸 게 더 중요해보였다. 미소를 띄며 다락방을 나온 사람들은 조심히 들어가라 말과 함께 흩어졌다. 따로 얘기를 더 나누는 사람은 없었다. 버스로, 지하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뉴스에 흔한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다.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잠(혼자 잠 자기)에 지쳐가는 우리의 연인이자, 직장동료, 선후배, 친구일지도 모른다.

모임 시작 전 주인장이 정한 ‘명함을 꺼내지 않는다’는 규칙은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색안경을 쓰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다. 그래서였을까.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일이고, 자기 고민이 아닐텐데 참석자들은 묵묵히 들었다. 아니 최선을 다해 들었다. 목적이 있어야 말하고, 이유가 있어야 듣는데 익숙해진 우리들. 올해는 그저 최선을 다해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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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김민성, 연구= 이재근 한경닷컴 기자 rot011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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