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셔츠를 입은 한 여성(사진)이 있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걸치고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있다. 나라를 온통 혼란에 빠뜨린 ‘비선 실세’ 최순실 씨를 흉내낸 것이다. 광화문 시위 현장에 등장한 이 모습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박근혜 대통령의 가명으로 사용된 ‘길라임’을 패러디한 피켓도 보였다. 길라임이 나오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남자주인공이 유행시킨 파란 반짝이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람들도 나타났다.

퍼포먼스와 상징물도 등장했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성은 “상처난 마음에 붙이세요”라며 반창고를 나눠줬다. ‘레임덕’을 의미하는 힘 빠진 대형 오리도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설치됐다. 분노만이 가득할 것 같은 광장. 그러나 풍자와 해학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작은 미소로 답했다.

풍자와 해학의 파급력은 정치적 구호나 쇠파이프의 물리력보다 강하다. 누구나 거부감 없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심각한 글과 영상보다 더 빠르고 널리 확산된다. 이 같은 문화적 행위는 극단적인 폭력 사태를 방지하고 성숙한 민주사회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까지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풍자와 해학을 즐겼다. 광대들의 마당극부터 미술, 문학 등 수단도 다양했다. ‘봉산탈춤’의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이지만 양반보다 더 똑똑하다. 재치있는 말들로 양반을 들어다 놨다 한다. 조선시대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민화도 마찬가지다. 동물, 곤충 등은 당시 정치 상황과 양반들의 위선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다.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이런 풍자와 해학의 전통이 단절됐다. 문화적 행위는 일부 예술가, 연예인의 전유물이 됐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대중이 직접 문화적 행위를 하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였다. 그러나 SNS 등 자기 표현의 수단이 발달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풍자와 해학을 담은 글과 영상도 자유자재로 올리고 편집할 수 있게 됐다. ‘좋아요’ ‘공유’ 버튼 하나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같은 생각을 나눈다.

풍자와 해학은 정치문화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 정치에서 ‘조크(joke·농담)’는 일상이다. ‘정치를 잘하려면 조크를 잘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그랬다. 정적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 의원이 링컨이 펼친 정책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링컨은 “잘 생각해봐라. 내가 얼굴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면 이 얼굴로 나왔겠느냐”고 받아쳤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뜨겁게 달궈진 머리는 웃음으로 한번 식혀졌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토론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가. ‘정치’란 말이 나오면 ‘뜨거운 가슴, 뜨거운 머리’만 남는다. 끝장 토론이 불가능하고, 끝장 싸움만 벌어지는 이유다. 최근 JTBC의 ‘썰전’이 지상파를 포함해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한 비결도 이와 관련 있다. 보수와 진보를 대표하는 전원책 변호사, 유시민 작가(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대화 속엔 위트가 담겨 있다. 기존 토론 프로그램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시청자들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풍자와 해학은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다. 이 때문에 딱딱한 분위기 속의 토론보다 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느낄 수 있다.

문화 영역은 ‘최순실 게이트’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았다. 대중보다 앞서 마음껏 생각을 표현해야 할 많은 예술가가 각종 이권을 챙기려는 이들의 개입에 억눌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가장 상처받은 영역도 문화요, 수많은 이가 이 상황을 견디고 극복하게 하는 것도 문화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화의 근본은 자기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선결 조건인 ‘자기 표현의 가치’를 국민은 스스로 높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의 저자 로널드 잉글하트는 말했다. “자기 표현의 가치가 중시될수록 선진국을 닮아간다. 이 가치의 확산은 민주주의 발전의 새로운 좌표가 될 것이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