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는 공적인 영역이 사유화되고 주술적·비합리적인 영역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나 《공화국의 위기》가 이럴 때 시사점을 줄 수 있습니다. 아렌트는 공적인 영역에서 시민들이 주체성을 갖고 발언할 때 이런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거든요.”

김언호 한길사 대표
김언호 한길사 대표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31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길그레이트북스’ 출간 2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한길그레이트북스(사진)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원전을 완역한다는 원칙으로 한길사가 동·서양 고전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해온 시리즈다. 1996년 1월 철학자 앨프레드 화이트헤드의 《관념의 모험》을 시작으로 최근 《함석헌 선집》(전 3권)까지 모두 150권이 출간됐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에릭 홉스봄 등 해외 유명 철학자의 사상을 다수 소개하며 국내에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렌트의 책도 다섯 권을 번역했다. 출간 20년 만인 올해 누적 판매 부수가 70만부를 넘어섰다.

김 대표는 “처음 시리즈를 시작할 당시 ‘이런 책이 한국에서 가능할까’라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출판사 매출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스테디셀러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전 저작들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 독서력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며 “시리즈로 소개할 책을 고를 때는 ‘오늘날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중점적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중 베스트셀러 1위는 1998년 나온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로 4만1500부가 팔렸다. 1935년 남아메리카 오지를 탐험한 뒤 쓴 책으로 ‘문명과 야만’이라는 개념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2위와 3위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2만8200부)과 《인간의 조건》(2만3300부)으로 아렌트가 쓴 책이다. 국내 고전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7위에 오른 김부식의 《삼국사기1》(1만4500부)이다.

김 대표는 “1980년대 민주화 과정 때 젊은이들이 책을 읽어서 나라와 사회를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한다”며 “젊은이들이 고전을 읽어야 우리 사회가 더 힘이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