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지지율의 함정…검증·연대 등 변수따라 급변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대선 1년 전…DJ·노무현·이명박도 '언더독'
1위였던 박찬종·고건 등 중도하차
2001년 지지율 1~2%였던 노무현, 본선서 '대세론' 이회창 꺾고 승리
지난 대선 1년 전엔 안철수가 1위…현재는 반기문·문재인 양강구도
1위였던 박찬종·고건 등 중도하차
2001년 지지율 1~2%였던 노무현, 본선서 '대세론' 이회창 꺾고 승리
지난 대선 1년 전엔 안철수가 1위…현재는 반기문·문재인 양강구도
대선을 1년2개월가량 앞둔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양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역대 대선 지지율 추이를 보면 선거를 1년~1년6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지지율 1위를 한 후보가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 돌발 변수에 따라 판세가 흔들리기 일쑤였다. 후보 간 연대 등 정치 지형을 급변시키는 요인도 있다.
이 때문에 지지율에서 밀리던 ‘언더독(underdog: 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이 막판 역전극을 펼치며 대권을 손에 넣곤 했다. 1997년 치러진 15대 대선을 1년6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박찬종 후보는 여권 내 1위 주자였지만 당시 여권 주류의 지원을 받는 데 실패했고, 결국 중도포기했다. 이후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40%대를 기록하며 선두를 달렸다. 2006년 하반기까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 지지율은 10%대였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이 후보는 1997년 6월 50%대, 김 후보는 30%대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 후보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과 탈당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결국 김 후보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2년 16대 대선 땐 1년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노무현 후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해 초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40~50%대를 기록한 반면 노 후보는 1~2%대에 불과했다. 노 후보는 3월 국민경선제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며 치고 올라왔고, 4월 말에는 60%대 지지율을 기록하며 반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이 후보가 다시 역전하면서 새천년민주당 내에선 후보 교체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노 후보가 2.3%포인트 차이로 신승했다.
17대 대선(2007년 12월) 1년 반 전인 2006년 6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지지도에서 3위였다. 당 경선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와 고건 후보가 1위 자리를 놓고 다퉜다. 이후 고 후보는 소극적인 행보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실패한 총리 기용 인사’ 발언 등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나타냈다. 이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 프로젝트’ 등을 내놓으며 치고 올라가 2007년 대부분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올랐고, 그 추세를 끝까지 이어갔다.
18대 대선 땐 선거 1년 반 전까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선두를 달리며 대세론을 형성했다. 2011년 하반기 ‘안풍(安風·안철수 바람)’이 불면서 역전됐다. 2012년 대부분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후보가 박 후보에게 앞섰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됐지만, 박 후보가 확고한 지지층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
이 때문에 지지율에서 밀리던 ‘언더독(underdog: 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이 막판 역전극을 펼치며 대권을 손에 넣곤 했다. 1997년 치러진 15대 대선을 1년6개월가량 앞둔 시점에서 박찬종 후보는 여권 내 1위 주자였지만 당시 여권 주류의 지원을 받는 데 실패했고, 결국 중도포기했다. 이후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30~40%대를 기록하며 선두를 달렸다. 2006년 하반기까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 지지율은 10%대였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이 후보는 1997년 6월 50%대, 김 후보는 30%대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 후보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과 탈당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결국 김 후보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2년 16대 대선 땐 1년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노무현 후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해 초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은 40~50%대를 기록한 반면 노 후보는 1~2%대에 불과했다. 노 후보는 3월 국민경선제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며 치고 올라왔고, 4월 말에는 60%대 지지율을 기록하며 반전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이 후보가 다시 역전하면서 새천년민주당 내에선 후보 교체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노 후보가 2.3%포인트 차이로 신승했다.
17대 대선(2007년 12월) 1년 반 전인 2006년 6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지지도에서 3위였다. 당 경선 경쟁자였던 박근혜 후보와 고건 후보가 1위 자리를 놓고 다퉜다. 이후 고 후보는 소극적인 행보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실패한 총리 기용 인사’ 발언 등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나타냈다. 이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 프로젝트’ 등을 내놓으며 치고 올라가 2007년 대부분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올랐고, 그 추세를 끝까지 이어갔다.
18대 대선 땐 선거 1년 반 전까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선두를 달리며 대세론을 형성했다. 2011년 하반기 ‘안풍(安風·안철수 바람)’이 불면서 역전됐다. 2012년 대부분의 신년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후보가 박 후보에게 앞섰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됐지만, 박 후보가 확고한 지지층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