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허문찬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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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사진)은 “정치적 잣대로 경제 문제를 바라보면 한국 경제는 저성장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생산성본부(KPC) 주최로 열린 정년퇴임 특별 강연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벌어진 세계 경제의 장기 침체와 저출산, 사회 갈등과 불신 등으로 인해 한국 경제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정 전 총장이 지난 1일 연세대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뒤 처음으로 한 이날 강연에는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김낙회 전 관세청장, 백만기 김앤장 변리사, 반원익 중견기업연합회 부회장 등 200여명의 경제전문가가 참석했다.

정 전 총장은 “전 세계 19개 국가가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등 기존 질서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며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뉴노멀 시대’를 극복하려면 제조업과 사물인터넷이 결합해 생산성을 높이는 4차 산업혁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전 총장은 한국의 경제 생태계가 크게 훼손됐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기업들이 국내에 대규모 투자를 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생태계가 무너졌다는 증거”라며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제 생태계 복원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 문제에 대한 탈(脫)정치화를 생태계 복원의 선결 과제로 꼽았다. 그는 “한국에선 경제 문제만 터지면 다음날 여야가 정반대 의견을 담은 성명부터 발표한다”며 “경제 문제가 정치화되는 이유는 정치인들이 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경제 문제가 정치적 이념으로 포장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판단에 혼란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제 문제의 탈정치화를 주도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이지만, 그들을 선택하는 것은 국민”이라며 “국민이 바른 정책과 포퓰리즘을 구분해 낼 수 있어야 경제의 탈정치화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정 전 총장은 최근 불거진 전기요금 누진제도를 예로 들며 “생산원가가 같은데 공급가격을 달리하면 이득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생겨 정치적 문제가 된다”며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위해선 생산원가와 판매가격을 같게 책정하고, 저소득 계층에 정부가 사회정책 차원에서 직접 보조금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하며 포지티브 방식(원칙 금지·예외 허용) 규제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는 “총장 시절 건설한 연세대 백양로 지하의 공연장 허가는 규정에 없다는 이유로 관할 구청, 문화체육관광부, 국토교통부를 돌고 돌다가 교육부에 가서 가까스로 받아냈다”며 “이게 모두 규정에 없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 탓”이라고 말했다. 정 전 총장은 “이런 규제 시스템에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벤처기업이 불법이 될 수밖에 없어 신(新)산업이 태동하기 어렵다”며 “기술의 결합으로 새로운 산업들이 등장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규제를 네거티브 방식(원칙 허용·예외 금지)으로 바꿔야 한다”고 설명했다.

정 전 총장은 “똑똑한 개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개체가 가장 강한 것”이라며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사회경제적·구조적 대격변기에 한국이 빠르게 적응해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글=김순신 /사진 =허문찬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