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장기전략을 아무도 내놓지 않는 시대. 경제부터 사회 안보 통일까지 중장기 해법 제시가 시급하지만 정부와 국책연구기관, 정당과 민간의 싱크탱크, 심지어 학계도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미래를 대비할 ‘지식 생태계’를 키우자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와 기업에서 독립된 크고 작은 싱크탱크들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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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가 브레인이 없다] "정부·기업서 독립된 '강소 싱크탱크'부터 키워 나가야"
◆생각하는 집단이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국가 과제를 지속적으로 챙길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5년에 한 번 치러지는 대선에서나 잠깐 큰 그림을 논하고, 이마저 정권이 바뀌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식으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중경 공인회계사회장(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결국 싱크탱크가 답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차곡차곡 해답을 만들어갈 수 있다”며 “지금 우리는 문제의 정의조차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황윤원 중앙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과거 싱크탱크가 국책연구원 위주로 간 것은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장기 이슈를 던져줄 수 있는 민간 싱크탱크를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과거처럼 기업 부설 연구소에 역할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기업이 처한 현실이 녹록지 않은 데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슈 또한 다양해졌다.

◆기부로 움직이는 헤리티지재단

국책 연구원, 기업 연구소도 아니라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많은 사람이 눈여겨보는 모델은 미국 헤리티지재단이다. 대표적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개인이나 기업 단체 등의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적게는 1년에 100달러씩, 많게는 1만달러 넘게 기부하는 시민들이 주축이다.

헤리티지재단에서 2년간 객원연구위원을 지낸 최 회장은 “헤리티지는 연구의 객관성을 위해 기업 등 꼬리표 붙은 돈은 절대 받지 않는다”며 “한국에서도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분위기가 돼야 제대로 된 싱크탱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도 싱크탱크로 분류되는 브루킹스연구소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16년 기업인이자 자선사업가인 로버트 브루킹스가 16만달러를 쾌척하며 설립된 뒤 지금은 기부금이 운영 수입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미국은 이처럼 개인들의 지원을 받은 싱크탱크가 치열한 정책 경쟁을 벌인다.

◆소규모 싱크탱크의 생태계부터

《한국형 싱크탱크의 발전전략》을 쓴 최형두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미국과 지적 풍토 및 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처음부터 헤리티지재단 같은 싱크탱크를 세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중소 싱크탱크의 생태계를 만드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모델은 전직 관료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그는 “국내 지식 생태계엔 중간지대가 없다”며 “공직을 마치면 경륜과 지혜를 다 버리게 되는데 이걸 사회로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직 관료 외에 학자와 민간 전문가 서너 명이 뭉치면 소규모 싱크탱크다. 각자 역량이 쌓이면 규모를 키우면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런 면에서 관료 선후배로부터 ‘롤 모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퇴직 후 로펌 등으로 가는 대신 개인연구소 ‘윤경제연구소’를 세워 활발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직에서 물러나 ‘자유인’이 된 만큼 정치권이나 정부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여시재의 새로운 실험

지난 18일 출범한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與時齋)’의 실험도 주목받고 있다. 여시재는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이 보유 주식 260만주(약 4400억원)를 출연해 설립했다. 조 회장은 여시재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재단에서 아무런 직함을 맡지 않았다.

여시재는 영국의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처럼 ‘네트워크형 싱크탱크’를 지향한다. 내부에 박사급 연구인력 20여명이 있지만 이들은 자체적으로 연구 보고서를 내지 않고 ‘이슈 트래킹(연구 주제를 정하는 것)’ 역할만 한다. 대신 다른 연구소의 전문가, 대학교수 등과 협력해 연구 결과를 낼 예정이다.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정부나 대학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립 연구재단은 국내에서 아산정책연구원을 제외하면 여시재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초당파 연구조직도 대안

상설조직이나 연구기관을 별도로 설립하지 않고 국가적인 위기대책을 연구하는 ‘초당파 태스크포스(TF)’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이 기로에 처하자 프린스턴대 우드로윌슨대학원이 그런 시도를 했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조지프 나이 전 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장 등 수백명이 3년간 토론에 참여한 결과 2006년 대외정책에 대한 원칙 보고서가 나왔다.

이름뿐인 정부 자문위원회를 지식 축적의 장으로 삼자는 제안도 나온다. 한 대학교수는 “4차 산업혁명, 가계부채 등 주제별로 위원회가 논쟁을 벌인 뒤 위원장이 보고서를 써 사회에 던지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아마르티아 센 등은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국내총생산(GDP)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경제지표를 제안했다. 이들의 방대한 보고서는 직후엔 실행되지 못했지만 최근 재조명받고 있다.

연구 분야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최 회장은 “경제문제는 그나마 덜하지만 비경제 분야 연구는 거의 텅 비어 있다”며 외교, 이민, 가족 가치의 재편, 통일, 교육 등 이슈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조언했다. 새로운 중장기 이슈도 발굴거리다. 이명호 여시재 수석연구위원은 “10여년 뒤 북극해 얼음이 완전히 녹으면 개방될 북극 항로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김유미/심성미/이상열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