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교하(交河)로 불리던 파주는 고려시대부터 원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파주라는 지명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조선 세조 때인 1459년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왕비 정희왕후를 위해 이곳을 ‘목’으로 승격시키고 지명도 파주로 고쳤다. 정희왕후는 파주에 터를 잡은 파평 윤씨다. 파주라는 지명은 파평 윤씨 가문 때문에 생겼다. 파평 윤씨의 파(坡) 자와 고을 주(州) 자를 따서 파주(坡州)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파주는 ‘둑 위의 마을’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파주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있어 예부터 둑과 제방이 많았다. 이 때문에 ‘언덕 파(坡)’와 ‘고을 주(州)’ 자가 합쳐졌다는 설도 있다.

파주는 한양에서 가까워 임진강을 따라 각종 유통이 발달했다. 이 중 고랑포와 문산포가 물류 집산지로 유명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민들은 한강 마포나루에서 고랑포나루와 문산포나루까지 소금과 새우젓을 황포돛배로 실어 날랐다. 파주의 큰 물줄기인 임진강(臨津江)은 과거에 더덜나루(다달나루)로 불렸다. 더덜나루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임진강이다. 임진강의 ‘임(臨)’은 ‘더덜’ 즉 ‘다닫다(다다르다의 사투리)’라는 뜻이며 ‘진(津)’은 ‘나루’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파주 고랑포 전경.
일제강점기 파주 고랑포 전경.
일제강점기까지 물류 집산지였던 파주는 6·25전쟁 때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파주 설마리전투가 대표적이다.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1951년 4월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에서 중공군의 공세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고지를 끝까지 방어했다. 지금도 매년 4월이면 참전한 영국 퇴역군인들이 이곳에서 기념식을 연다.

1980년대 파주 금촌역 광장 모습.
1980년대 파주 금촌역 광장 모습.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파주는 북한과 철책선을 마주한 대표적인 군사도시가 됐다. 파주시 전체 면적(672.9㎢)의 91%인 612.3㎢가 지금도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속해 있다. 파주시는 2007년 제정된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보호법’에 따라 군과 협의해 여의도 면적(2.9㎢)의 20배가 넘는 60.6㎢를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해제했다.

파주=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