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결정을 후회하고 재투표를 주장하는 영국인이 속출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 등 브렉시트 찬성파의 일부 주장이 허구였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이른바 ‘리그렉시트(Regrexit)’ 움직임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리그렉시트란 ‘후회하다(Regret)’와 ‘브렉시트(Brexit)’를 합친 말로 브렉시트 결정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2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 참석해 기자들에게 “영국과 EU가 교역 및 안보협력 측면에서 가능한 한 가까운 관계를 추구하기를 희망한다”며 “그것이 영국에도 좋고 그들에게도 좋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캐머런 총리는 “영국의 EU 탈퇴를 설명할 것이며 브렉시트 절차가 건설적이길 원한다”며 재투표 주장에 분명히 선을 그었다.

○‘리그렉시트’ 움직임 확산

브렉시트 찬반 재투표를 요구하는 서명은 27일(현지시간) 400만명에 육박했다. 영국 의회는 서명자 수가 10만명을 넘으면 논의 여부를 검토할 수 있다.

집권 보수당의 제러미 헌트 보건장관은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기고에서 “탈퇴를 위한 리스본조약 50조를 곧바로 발동해서는 안 된다”며 재투표를 검토하자고 주장했다. 리스본조약 50조는 EU를 탈퇴하려는 회원국이 결별을 선언한 시점부터 2년 안에 EU와의 향후 무역 조건 등에 대한 협상을 완료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직 장관의 발언이 공개되면서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던 브렉시트 찬반 재투표가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국민투표만으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만큼 리스본조약 50조를 발동하지 않으면 브렉시트를 피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그리스가 지난해 EU의 긴축 조치 수용을 둘러싼 국민투표 결과를 무시했듯 영국 의회도 이번 투표 결과를 받아들일 의무는 없다고 보도했다.

NYT는 또 브렉시트에 반대해온 스코틀랜드 의회가 거부권을 행사해도 EU에 잔류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재투표를 하거나 EU와 맺은 각종 교역 조건 등을 현 상태로 유지한 채 EU 회원국 자격만 상실해 노르웨이처럼 EU와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는 방안 등을 거론했다.

○궁지 몰린 EU 탈퇴파…‘피루스의 승리’

재투표 여론이 거세진 데다 파운드화 급락 등 브렉시트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예상보다 커지면서 EU 탈퇴를 주도한 찬성파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존슨 전 런던시장은 브렉시트 결정 이후 “EU를 떠나는 것이 유럽대륙의 ‘도개교(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상판이 들리는 구조의 다리)’를 들어올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발 물러섰다. 가디언은 존슨 전 런던시장을 가리켜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고 표현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승리여서 패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탈퇴 진영의 일부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재투표 요구는 더 거세지는 분위기다. 나이절 패라지 영국독립당 대표, 존슨 전 런던시장 등은 “영국이 매주 EU에 내는 분담금 3억5000만파운드(약 5500억원)를 국민보건서비스(NHS)에 지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EU로부터 되돌려받는 보조금을 고려할 경우 분담금 규모는 실제 1억5000만파운드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패라지는 방송에서 “(공약 이행을) 보장할 수 없다. 실수였다”고 실토했다.

조지프 스턴버그 월스트리트저널 편집위원은 “탈퇴 진영이 EU 때문에 영국에 이민자가 밀려들어오고 EU의 규제로 영국의 작은 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영국은 지나친 보조금이나 신재생에너지 의무 사용 등 영국 내부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브렉시트 결정이 난 지난 24일 기자회견에 등장한 존슨의 표정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반(反)EU 성향의 패라지 영국독립당 대표는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의회 특별회의 연설에서 “17년 전에 브렉시트 캠페인을 이끌고 싶다고 했을 때 모두가 날 비웃었는데 지금도 웃음이 나오냐”며 막말하다가 마르틴 슐츠 유럽의회 의장에게 제지를 받았다. 하지만 패라지 대표는 “영국이 EU를 떠나는 마지막 국가가 아닐 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다.

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