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고국의 유학생 돕자"…한국 과학의 초석 다진 화학자 김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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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창의재단 공동기획
국민이 뽑은 과학자 (10) 김순경
재미한인과학자협회 결성…젊은 유학생 지원 나서
세계서 인정받은 '군론' 등 논문 72편, 저서 4권 발간
국민이 뽑은 과학자 (10) 김순경
재미한인과학자협회 결성…젊은 유학생 지원 나서
세계서 인정받은 '군론' 등 논문 72편, 저서 4권 발간
“우리 한인 과학자들은 서로 아는 지식을 모아 조국의 허다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려고 한다.”
고(故) 김순경 템플대 명예교수(1920~2003·사진)는 1972년 4월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가 발행한 첫 회보에 협회 결성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1971년 12월11일 미국 워싱턴DC 윈저 파크호텔에 수수한 정장 차림의 30~40대 젊은 한국인 과학자와 유학생 69명이 모였다. 미국 대학과 연구소, 기업에서 과학과 공학 분야에 종사하던 교수와 엔지니어, 학생이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작은 힘이나마 고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을 주고 타향에서 연구와 학업을 이어가는 동포를 돕자며 뜻을 모았다. 약 3000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재외 한인 최대 과학자 조직인 KSEA가 결성된 순간이었다.
협회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된 김 명예교수는 당시 재미 한인 과학자 사이에선 가장 선배였다. 미국 유학 후 서울대 교수로 일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템플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 명예교수의 제자이자 7대 회장을 지낸 최상일 전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비록 한국을 떠났지만, 항상 고국의 학문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며 “후배 과학자와 유학생들을 볼 때마다 가족처럼 대하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며 격려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초창기 협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의 젊은 과학자와 유학생들은 가난했다. 작은 사무실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다. 독재 정권의 어용단체가 될 수 있다는 오해까지 받아 회원 모집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협회는 각종 학술대회, 한·미 공동연구 프로젝트, 차세대 과학기술자 지원 등 활동을 조금씩 넓혀나갔다. 김 명예교수 바람대로 협회 주도로 열리는 학술회의인 한미과학자대회(UKC)는 이제 매년 수백 명의 과학자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협회 활동을 하던 젊은 과학자와 유학생 일부는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포항공대(현 포스텍) 설립에 핵심 역할을 했다.
김 명예교수는 학술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6·25전쟁 이후 혼란의 시기 한국 화학계에 이론물리화학의 뿌리를 내렸다. 강전해질 용액론, 수리물리학, 유체의 수송현상, 화학반응 속도론, 기체의 흡착이론 등 이론 물리화학 분야에서 72편의 논문과 4권의 저서 및 3권의 번역서를 썼다. 화학에 대해 물리학적 접근을 시도한 ‘군론(群論·group theory)’을 완성한 일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김 명예교수의 연구 업적을 기려 1999년 군론 연구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다. 한국연구재단은 2012년 한국 학술연구 100년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김 명예교수의 연구 업적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고(故) 김순경 템플대 명예교수(1920~2003·사진)는 1972년 4월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KSEA)가 발행한 첫 회보에 협회 결성 배경을 이렇게 적었다. 1971년 12월11일 미국 워싱턴DC 윈저 파크호텔에 수수한 정장 차림의 30~40대 젊은 한국인 과학자와 유학생 69명이 모였다. 미국 대학과 연구소, 기업에서 과학과 공학 분야에 종사하던 교수와 엔지니어, 학생이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작은 힘이나마 고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도움을 주고 타향에서 연구와 학업을 이어가는 동포를 돕자며 뜻을 모았다. 약 3000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재외 한인 최대 과학자 조직인 KSEA가 결성된 순간이었다.
협회 결성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에 추대된 김 명예교수는 당시 재미 한인 과학자 사이에선 가장 선배였다. 미국 유학 후 서울대 교수로 일하던 그는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템플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 명예교수의 제자이자 7대 회장을 지낸 최상일 전 노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비록 한국을 떠났지만, 항상 고국의 학문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며 “후배 과학자와 유학생들을 볼 때마다 가족처럼 대하면서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연구와 공부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며 격려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초창기 협회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의 젊은 과학자와 유학생들은 가난했다. 작은 사무실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다. 독재 정권의 어용단체가 될 수 있다는 오해까지 받아 회원 모집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협회는 각종 학술대회, 한·미 공동연구 프로젝트, 차세대 과학기술자 지원 등 활동을 조금씩 넓혀나갔다. 김 명예교수 바람대로 협회 주도로 열리는 학술회의인 한미과학자대회(UKC)는 이제 매년 수백 명의 과학자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협회 활동을 하던 젊은 과학자와 유학생 일부는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포항공대(현 포스텍) 설립에 핵심 역할을 했다.
김 명예교수는 학술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6·25전쟁 이후 혼란의 시기 한국 화학계에 이론물리화학의 뿌리를 내렸다. 강전해질 용액론, 수리물리학, 유체의 수송현상, 화학반응 속도론, 기체의 흡착이론 등 이론 물리화학 분야에서 72편의 논문과 4권의 저서 및 3권의 번역서를 썼다. 화학에 대해 물리학적 접근을 시도한 ‘군론(群論·group theory)’을 완성한 일은 그의 대표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김 명예교수의 연구 업적을 기려 1999년 군론 연구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다. 한국연구재단은 2012년 한국 학술연구 100년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김 명예교수의 연구 업적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