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시(詩)가 품은 가락 스스로 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좋은 곡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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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가수 겸 작곡가 김현성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종이 위 활자로 머물러 있던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하모니카와 기타 소리에 얹힌 노래로 되살아난다. ‘시를 썼을 그날’의 윤동주가 ‘시를 노래하는 날’의 가수를 통해 부활한다. 그 순간만은 윤동주의 ‘서시’가 국어나 역사 교과서 속 ‘박제된 작품’이 아니다. 과거의 평면에 머물러 있는 시를 현재의 오선지로 불러낸 사람, 가수 겸 작곡가 김현성 씨(54·사진)다.
김씨의 손에서 가락을 타고 다시 살아난 시는 윤동주의 작품만이 아니다. 백석과 정호승, 김용택, 고두현 등 여러 시인의 작품이 그의 노래로 ‘환생’했다. 대다수 사람에게 그는 ‘시를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보다는 고(故) 김광석의 히트곡 ‘이등병의 편지’와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작곡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올해는 김광석 20주기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음악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이를 향해 굳이 ‘추모’나 ‘헌정’이란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나는 시를 즐기는 독자로서 작곡과 노래를 택했을 뿐 다른 뜻은 없다”며 “다만 아무 시에나 곡을 붙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시를 소재로 작곡한다고 하면 무슨 거창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문학을 좋아하는 음악인입니다. 시인의 명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이끈다면 무명 시인 작품으로도 얼마든지 곡을 쓸 수 있죠.”
10대 시절부터 ‘시의 노래’ 꿈꿔
김씨가 ‘시 속에 숨은 가락 찾기’에 빠져든 데는 중학생 때 교과서에서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때 그 시를 보고 처음으로 ‘아, 이걸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활자가 풍경화로 연결되는 걸 체감하면서 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운 김씨는 1984년 서울예술전문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레코드사 전속 가수 겸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작곡한 것도 1984년이다. “스물한 살 때였어요. 한창 친구들이 입대할 때였죠. ‘이등병의 편지’는 서울역에서 논산훈련소로 입대하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썼어요. 나중에 광석이(김광석)가 리메이크해서 유명해졌죠.”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으면서 ‘시를 노래로 만들겠다’는 열망은 더 커졌다. “요즘은 미리 나온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래도 음악은 어느 정도 패턴을 벗어날 수 없죠. 시에는 사유의 힘이 있습니다. 시인들은 같은 걸 보고도 날마다 다르다고 말해요. 오늘은 ‘희다’고 한 것을 내일은 ‘빨갛다’고 하는 식이죠. 관점의 경계가 없다는 걸 배우고 싶었습니다.”
시를 노래로 만드는 건 대중가요와 광고음악처럼 ‘돈 되는 일’이 아니다. 오롯이 김씨의 몫이었다. 녹음과 발매, 공연 등 모든 비용을 자신이 댔다. “제가 하는 일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요즘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돈을 모아 줘요. 그럴 때면 보람도 많이 느낍니다. 이것이야말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100% 제가 원해서,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시를 읊는 건 시대를 기억하는 것
“시를 노랫말로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기다림”이라고 답했다. “젊을 땐 좋은 시를 보면 무조건 곡부터 붙이려고 덤볐어요. 그런데 그러면 절대 좋은 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시는 저마다 가락을 품고 있어요. 시가 스스로 작곡자에게 그 가락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하나의 시를 놓고 10년 넘게 기다린 때도 있죠.”
백석은 그를 ‘괴롭힌’ 대표적인 시인이다. 백석의 시를 노래로 되살리는 작업을 한 건 안도현 시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안 시인이 ‘내 멘토는 백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백석의 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백석의 시가 워낙 산문에 가깝고 긴 게 많다 보니 노래로 만드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그가 왜 그런 시를 썼는지 시대상을 이해하려 백석 평전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런 시인들의 작품에는 무턱대고 곡을 붙이겠다고 달려들었다가는 나가떨어져요. 남북통일이 되면 북에 가서 백석 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윤동주의 시집은 낱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읽었다. 그는 “윤동주에게 시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며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젊음의 순수가 빛났기에 죽어서도 계속 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이 언젠가 ‘나이 든 윤동주의 시를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광복을 맞은 뒤 어떻게 살았을지, 그런 불행한 역사 아래 태어난 시인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등 여러 안타까움이 뒤섞인 것이죠.”
오는 14일 홍대 베짱이홀서 ‘詩 콘서트’
김씨가 최근 발표한 앨범은 고두현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지난 3월 말 내놓은 ‘어머니와 시(詩)와 남해’다. 고 시인은 ‘늦게 온 소포’ ‘남해 멸치’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앨범엔 노랫말과 시 원문, 김씨와 고 시인의 창작 뒷얘기 등을 곁들였다. 독자와 팬들이 크라우드 펀드로 제작비를 보탰다. 오는 14일 서울 홍익대 앞 소극장 베짱이홀에서 북콘서트가 열린다.
“고 시인의 시를 무대에서 노래할 땐 관객 중에 꼭 우는 사람이 나와요. 그의 작품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게 사람들 가슴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시를 사랑해서일까. 김씨에게서는 독특한 개성이 물씬 풍겨 나온다. 그가 운영하는 음반·공연기획사 이름도 ‘노래의 인문학’이다. “서른 살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독서를 하다 보면 여러 분야가 서로 생각의 힘이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되죠. 집도 경기 여주의 한 시골 마을에 지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불편한 것 없이 지내요. 음악을 하려면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였으니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시에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죠.”
그는 아직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자동차를 ‘모시며’ 살고 싶지 않아서”다. “늙어서 TV 앞에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경로당에 가서 수다 떠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게 철칙이다. “늙어서 추해지지 않으려면 젊어서부터 문화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쉰 살은 넘어야 진짜 인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육체적 근력이 떨어져요. 그걸 막으려면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하죠.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데 가장 좋은 게 활자를 습관처럼 접하는 겁니다. 정신의 근력이 떨어지는 순간 ‘꼰대’로 추락해요.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죠. 그러면 창작은 끝나버립니다. 자유를 노래한다면 이념과 생각의 경계도 자유롭게 허물어야 해요. 그래야 살아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노래의 날개' 달며 더 유명해진 시
'진달래꽃', '향수' 등 간결한 운율 속 깊은 울림
한국 시 중에는 가요와 동요, 가곡 등의 노랫말로 쓰여 대중적으로 친숙해진 작품이 많다. 노래로 만들어진 시는 대부분 길이가 길지 않고, 쉬운 시어를 쓰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게 특징이다.
이 같은 사례의 대표적 시인은 김소월이다.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산유화’ 등 많은 그의 시가 가요와 동요로 재탄생했다. 김소월 시 특유의 간결한 운율에 담긴 애절한 한(恨)과 사랑의 정서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의 시를 노래하게 한다. 가수 송창식 씨가 부른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양희은 씨가 부른 고은 시인의 ‘세노야’ 등도 유명하다.
노래를 통해 시인이 재평가된 경우도 많다. 테너 박인수 씨와 가수 이동원 씨가 함께 불러 유명한 노래 ‘향수’가 대표적이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1927년 발표한 시다. 정지용은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다듬어 향토적 정서와 자연에 대한 감상을 탁월하게 표현한 시인으로 문단에서 이름이 높았지만,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뒤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못했다. ‘향수’가 가요로 재탄생해 큰 사랑을 받으면서 그 역시 재조명받았다.
최근에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 가수들 사이에서 노랫말로 사랑받고 있다. 그의 시 중 60여편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김광석의 유작 앨범에 담긴 ‘부치지 않은 편지’, 가수 안치환 씨가 부른 ‘풍경 달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수선화에게’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김씨의 손에서 가락을 타고 다시 살아난 시는 윤동주의 작품만이 아니다. 백석과 정호승, 김용택, 고두현 등 여러 시인의 작품이 그의 노래로 ‘환생’했다. 대다수 사람에게 그는 ‘시를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수식어보다는 고(故) 김광석의 히트곡 ‘이등병의 편지’와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작곡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서울 역삼동 작업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올해는 김광석 20주기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음악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이를 향해 굳이 ‘추모’나 ‘헌정’이란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나는 시를 즐기는 독자로서 작곡과 노래를 택했을 뿐 다른 뜻은 없다”며 “다만 아무 시에나 곡을 붙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시를 소재로 작곡한다고 하면 무슨 거창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저 문학을 좋아하는 음악인입니다. 시인의 명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이끈다면 무명 시인 작품으로도 얼마든지 곡을 쓸 수 있죠.”
10대 시절부터 ‘시의 노래’ 꿈꿔
김씨가 ‘시 속에 숨은 가락 찾기’에 빠져든 데는 중학생 때 교과서에서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는 “그때 그 시를 보고 처음으로 ‘아, 이걸 노래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활자가 풍경화로 연결되는 걸 체감하면서 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때 기타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운 김씨는 1984년 서울예술전문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하고, 레코드사 전속 가수 겸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이등병의 편지’를 작사·작곡한 것도 1984년이다. “스물한 살 때였어요. 한창 친구들이 입대할 때였죠. ‘이등병의 편지’는 서울역에서 논산훈련소로 입대하는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썼어요. 나중에 광석이(김광석)가 리메이크해서 유명해졌죠.”
싱어송라이터로 인정받으면서 ‘시를 노래로 만들겠다’는 열망은 더 커졌다. “요즘은 미리 나온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쓰는 경우가 많아요. 아무래도 음악은 어느 정도 패턴을 벗어날 수 없죠. 시에는 사유의 힘이 있습니다. 시인들은 같은 걸 보고도 날마다 다르다고 말해요. 오늘은 ‘희다’고 한 것을 내일은 ‘빨갛다’고 하는 식이죠. 관점의 경계가 없다는 걸 배우고 싶었습니다.”
시를 노래로 만드는 건 대중가요와 광고음악처럼 ‘돈 되는 일’이 아니다. 오롯이 김씨의 몫이었다. 녹음과 발매, 공연 등 모든 비용을 자신이 댔다. “제가 하는 일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요즘은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돈을 모아 줘요. 그럴 때면 보람도 많이 느낍니다. 이것이야말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100% 제가 원해서,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시를 읊는 건 시대를 기억하는 것
“시를 노랫말로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기다림”이라고 답했다. “젊을 땐 좋은 시를 보면 무조건 곡부터 붙이려고 덤볐어요. 그런데 그러면 절대 좋은 곡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시는 저마다 가락을 품고 있어요. 시가 스스로 작곡자에게 그 가락을 내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하나의 시를 놓고 10년 넘게 기다린 때도 있죠.”
백석은 그를 ‘괴롭힌’ 대표적인 시인이다. 백석의 시를 노래로 되살리는 작업을 한 건 안도현 시인의 권유 때문이었다. “안 시인이 ‘내 멘토는 백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백석의 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백석의 시가 워낙 산문에 가깝고 긴 게 많다 보니 노래로 만드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그가 왜 그런 시를 썼는지 시대상을 이해하려 백석 평전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런 시인들의 작품에는 무턱대고 곡을 붙이겠다고 달려들었다가는 나가떨어져요. 남북통일이 되면 북에 가서 백석 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윤동주의 시집은 낱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읽었다. 그는 “윤동주에게 시는 자기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며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젊음의 순수가 빛났기에 죽어서도 계속 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이 언젠가 ‘나이 든 윤동주의 시를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광복을 맞은 뒤 어떻게 살았을지, 그런 불행한 역사 아래 태어난 시인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등 여러 안타까움이 뒤섞인 것이죠.”
오는 14일 홍대 베짱이홀서 ‘詩 콘서트’
김씨가 최근 발표한 앨범은 고두현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지난 3월 말 내놓은 ‘어머니와 시(詩)와 남해’다. 고 시인은 ‘늦게 온 소포’ ‘남해 멸치’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앨범엔 노랫말과 시 원문, 김씨와 고 시인의 창작 뒷얘기 등을 곁들였다. 독자와 팬들이 크라우드 펀드로 제작비를 보탰다. 오는 14일 서울 홍익대 앞 소극장 베짱이홀에서 북콘서트가 열린다.
“고 시인의 시를 무대에서 노래할 땐 관객 중에 꼭 우는 사람이 나와요. 그의 작품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많은데 이게 사람들 가슴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시를 사랑해서일까. 김씨에게서는 독특한 개성이 물씬 풍겨 나온다. 그가 운영하는 음반·공연기획사 이름도 ‘노래의 인문학’이다. “서른 살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독서를 하다 보면 여러 분야가 서로 생각의 힘이 연결돼 있음을 알게 되죠. 집도 경기 여주의 한 시골 마을에 지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불편한 것 없이 지내요. 음악을 하려면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게다가 시와 노래는 원래 하나였으니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시에 관심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죠.”
그는 아직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자동차를 ‘모시며’ 살고 싶지 않아서”다. “늙어서 TV 앞에 하릴없이 앉아 있거나 경로당에 가서 수다 떠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게 철칙이다. “늙어서 추해지지 않으려면 젊어서부터 문화적 소양을 길러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쉰 살은 넘어야 진짜 인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육체적 근력이 떨어져요. 그걸 막으려면 ‘정신의 근력’을 키워야 하죠. 정신의 근력을 키우는 데 가장 좋은 게 활자를 습관처럼 접하는 겁니다. 정신의 근력이 떨어지는 순간 ‘꼰대’로 추락해요. 자신만 생각하고 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죠. 그러면 창작은 끝나버립니다. 자유를 노래한다면 이념과 생각의 경계도 자유롭게 허물어야 해요. 그래야 살아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노래의 날개' 달며 더 유명해진 시
'진달래꽃', '향수' 등 간결한 운율 속 깊은 울림
한국 시 중에는 가요와 동요, 가곡 등의 노랫말로 쓰여 대중적으로 친숙해진 작품이 많다. 노래로 만들어진 시는 대부분 길이가 길지 않고, 쉬운 시어를 쓰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달하는 게 특징이다.
이 같은 사례의 대표적 시인은 김소월이다. ‘진달래꽃’ ‘엄마야 누나야’ ‘개여울’ ‘산유화’ 등 많은 그의 시가 가요와 동요로 재탄생했다. 김소월 시 특유의 간결한 운율에 담긴 애절한 한(恨)과 사랑의 정서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의 시를 노래하게 한다. 가수 송창식 씨가 부른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양희은 씨가 부른 고은 시인의 ‘세노야’ 등도 유명하다.
노래를 통해 시인이 재평가된 경우도 많다. 테너 박인수 씨와 가수 이동원 씨가 함께 불러 유명한 노래 ‘향수’가 대표적이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1927년 발표한 시다. 정지용은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다듬어 향토적 정서와 자연에 대한 감상을 탁월하게 표현한 시인으로 문단에서 이름이 높았지만,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뒤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못했다. ‘향수’가 가요로 재탄생해 큰 사랑을 받으면서 그 역시 재조명받았다.
최근에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이 가수들 사이에서 노랫말로 사랑받고 있다. 그의 시 중 60여편이 노래로 만들어졌다. 김광석의 유작 앨범에 담긴 ‘부치지 않은 편지’, 가수 안치환 씨가 부른 ‘풍경 달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수선화에게’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