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중심…미국식 '큰 혁신'
창의적 소수의 도약적 아이디어 구현…신제품 개발, 신산업 개척에 강점
티끌 모아 태산…일본식 '작은 개선'
구성원의 팀플레이 통한 점진적 수정…첨단산업보다 전통산업에 강해
한국은 '오너십' 덕분 혁신도약 가능
정규석 <강원대 경영회계학부 교수 >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1만여년 전에 농경시대가 열린 후 인류의 혁신은 느리게 진행됐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촉발된 산업혁명은 기계의 발명과 같은 혁신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의 산업력은 세계를 주도했다.
20세기는 미국이 혁신을 주도하며 ‘미국의 시대’를 열었다. 프레드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에 의한 공장관리의 합리성 등장, 포드의 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한 본격적인 생산성 향상 같은 ‘생산혁신’과 에디슨 등 많은 발명가의 발명품에 의한 ‘제품혁신’은 미국이 세계의 혁신을 주도하는 힘이었다. 이후 미국적인 것은 그것이 상품이든, 경영방식이든 세계의 표준이 됐다.
그러던 미국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력한 경쟁력을 지닌 일본 제품의 등장으로 충격에 빠졌다. 일본산 자동차와 가전제품이 미국산보다 더 싸면서도 품질은 더 좋다는 인정하기 힘든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글로벌 무역시장에서 저품질·저가격의 3류 상품이었던 일본 제품은 1960년대에 중품질·중가격이 된 뒤 1970년대 후반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이를 깨닫지 못하다가 제2차 오일쇼크로 자동차 연비를 중시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제품의 품질 경쟁력을 알게 된 것이다. 미국 NBC TV는 1980년 6월 ‘일본이 할 수 있다면, 왜 우리라고 못하겠느냐’는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이후 미국 학계와 산업계는 일본 제품의 경쟁력 비결이 무엇인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품질관리 분임조와 제안제도 및 전사적 품질관리(TQC)와 적기공급시스템(JIT: just in time) 같은 혁신제도, 종신고용제나 연공서열제 같은 직원의 충성심을 높이는 일본식 인사제도 같은 것들이 논의됐다. 그중 일부는 미국 기업에 도입됐지만 기대만큼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일본 제품 경쟁력 향상의 핵심은 ‘가이젠(개선의 일본식 발음)’이란 일본식 혁신 방식에 있음이 최종적으로 알려졌다. 가이젠의 특징은 다수가 참여하는 지속적·점진적 혁신이다. 미국 기업과 미국인이 생각하는 혁신은 ‘획기적인 혁신(innovation)’이다. 반면 일본 기업이 선호하는 방식은 개선(改善)이라고 부르는 ‘작은 혁신(improvement)’이다. 미국은 도약적 혁신을 이뤄내는 주체가 경영자나 탁월한 엔지니어 등 창의적 소수인 데 비해 일본은 현장 생산직을 포함한 평범한 다수가 개선에 참여해 지속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를 구분해 미국식 큰 혁신은 ‘혁신’, 일본식 작은 혁신은 ‘개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일본식 작은 개선을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가이젠’ 또는 ‘지속적 개선(CI·continuous improvement)’이라 부른다. 즉 미국은 소수의 토끼가, 일본은 다수의 거북이가 혁신을 주도한다고 볼 수 있다. 운동경기에서 소수의 스타가 중심인 팀과 팀 플레이가 중심인 팀과의 경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기업 간 경쟁이란 결국 혁신력의 경쟁인데, 일본 기업의 혁신 스타일이 혁신총량에서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이 일본식 혁신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일본식 혁신의 특징인 다수가 참여하는 지속적 개선을 제도화하려다 보니 일본식 혁신의 대표격인 TQC에 그것이 가장 잘 담겨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전사적 품질경영(TQM)이란 형태로 도입했다. 이 모델은 미국에서 1987년 말콤 볼드리지 국가품질상이 제정되면서 산업계에 확산됐으며, 오늘날 세계적으로 100개 정도의 국가에서 채택한 글로벌 경영모델의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조직의 혁신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선의 혁신 방식은 각자 위치에서 스타는 큰 혁신을 주도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작은 개선을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S&P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한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기업혁신 조사 연구에 따르면 ‘개선이 80~90%, 혁신이 10~15% 정도 비율이 되는 것이 적당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대다수 기업이 혁신과 개선을 동시에 중시하며 혁신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혁신시스템은 국가의 문화 및 인재양성체계와 같은 혁신 인프라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국가별로 그 강약점이 다르다. 다양한 인종적 구성의 기반 위에 창의적 교육을 중시하고,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며, 대학의 연구 경쟁력이 세계 최강인 미국은 혁신에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주입식 교육에 중점을 두고 개성보다는 중용과 화합을 중시하며, 수월성 교육보다는 대중교육이 강해서 상대적으로 혁신에 약하고 대중의 역량에 의존하는 개선에 강한 편이다.
기술적 혁신에 강한 국가는 신제품 개발이나 새로운 산업의 개척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개선에 강한 국가는 상대적으로 전통산업에서 강점을 보인다. 미국이 첨단산업에 강한 것은 혁신이 강하기 때문이고, 한국이나 일본이 첨단산업과 벤처기업에 약하고 상대적으로 전통산업에 강한 것은 혁신이 약하고 개선에 강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은 대체로 개선이 강하지만 경영혁신 측면에서 한국은 오너체제의 강점으로 인해 혁신력이 강한 면모를 보인다. 삼성전자가 일본의 전자산업을 추월한 것은 일본이 64메가 메모리 반도체를 먼저 개발해 놓고도 시장이 불확실하다며 투자를 미루는 사이에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과감하게 투자를 했고, 최고경영자(CEO)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화로 먼저 전략적 방향을 제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전문경영인 체제인 일본은 과감한 투자라는 혁신적 의사결정이 어려운 반면 오너 체제인 한국은 경영자 주도의 위험감수적 경영혁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 근로자의 개선력과 경영자의 혁신력이 결합해 일본의 개선력을 추월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자동차 대량 생산공장 투자 결정, 조선산업 진출 등 한국의 기업 발전사에는 이런 경영자 주도의 혁신 사례가 풍부함을 볼 수 있다.
한국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근로자의 개선력이 강한 편이고 오너 경영자의 혁신 의지도 있다. 과제는 기술 측면에서 획기적인 상품을 개발해 산업을 선도하는 기술적 혁신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교육시스템, 대학의 연구 경쟁력, 기업 인사시스템 등 여러 측면에서 혁신을 격려하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삼성이 여러 해 전부터 혁신을 주도할 ‘천재경영’을 제창했지만 아직 천재나, 새로운 산업을 이끌어갈 벤처기업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게 사실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창조경제’는 혁신을 주도할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정규석 <강원대 경영회계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