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화 "수조원 풀린 벤처시장…중소기업, 해외로 안 나가면 거품 또 터진다"
2013년 3월 한정화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사진)가 중소기업청장으로 선임됐다. 17년간 행정관료들이 맡았던 자리에 민간 출신이 간 것은 처음이었다. 중소기업청 주변에서는 우려하는 소리가 나왔다. “교수 출신이 조직을 장악할 수 있겠나,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다 갈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그는 지난 18일 퇴임했다. 청장 재임기간은 2년10개월. ‘역대 최장수 중소기업청장’으로 기록됐다. 중소기업청 내부에서는 “외부 눈치 보지 않고 ‘발로 뛴’ 청장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작년 말 서울 서초동 한국벤처투자 빌딩에서 한 전 청장을 만났다. 청와대에 “그만하겠다”고 통보한 직후였다. 한 청장은 벤처정책과 중소기업 정책은 물론 노동개혁 등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털어놨다.

◆중소기업 글로벌화 과제

그는 최근 벤처투자가 확산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망한 벤처가 많이 나와야 대기업 성장 정체의 공백을 메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도 했다. 그는 “창업 및 벤처시장에 들어오는 투자금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자칫하면 2000년대 초반의 ‘벤처거품’ 사태의 재연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돈은 넘쳐나지만 이 돈을 투자받은 기업들이 성공하기에 국내시장이 너무 좁다는 얘기다. 그는 “미국은 벤처캐피털(VC) 등이 될 만한 회사에 자금을 몰아줘 벤처 거품을 사전에 막는다”며 “아직 국내에 이런 시스템이 없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정화 "수조원 풀린 벤처시장…중소기업, 해외로 안 나가면 거품 또 터진다"
해법은 글로벌화라고 했다. 그는 “국내에서 승부를 보는 내수형 모델에 머물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며 “이런 기업의 성장은 매출 300억~500억원대가 한계”라고 했다. 대기업에 의존하지 말고 해외시장으로 나가야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정부의 벤처지원 정책도 ‘선택과 집중’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골고루 나눠주는 대신 ‘싹수가 보이는’ 업체를 발굴해 해외 진출을 할 수 있게 밀어줘야 한다는 것.

◆중국 공략 못하면 ‘천추의 한’

한 전 청장은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라고도 했다. 그는 “중소기업들은 과거 글로벌 시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때문에 불리했지만 지금은 한류 등으로 ‘코리아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활용해 공략할 시장으로는 중국을 꼽았다. “최근 급성장하는 중국 내수시장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한국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한 전 청장은 최근 중소기업청 내에 중국시장팀을 새로 신설했다. 그는 “중소기업들이 겪을 수 있는 비관세 장벽을 극복하고, 밀착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 전 청장은 이런 수출형 벤처기업이 나오려면 최고의 인재들이 창업시장으로 나와야 한다는 의견도 밝혔다. 그는 “2000년대 초 벤처붐이 불 때 대기업에 다니던 많은 인재가 창업에 뛰어들었다”며 “생계형 창업이 아니라 대기업 등에서 교육을 받은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자발적으로 창업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대기업의 성장정체도 이런 벤처기업의 성장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대기업은 구조적인 한계로 성장이 둔화됐다”며 “해외를 무대로 뛰는 중소·중견기업이 새로운 동력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각종 지원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한국형 히든챔피언인 ‘월드클래스’ 기업을 3000개로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이런 기업을 300개 육성하겠다는 취지로 ‘월드클래스 300’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를 ‘월드클래스 3000’으로 바꿔야 한다는 얘기다.

◆中企 정책, 사회개혁 함께해야

한 전 청장은 임기 중 가장 큰 성과로 창업생태계 구축을 꼽았다. 지난해 신설법인은 역대 최초로 9만개를 넘어섰다. 창업활성화의 필수조건인 인수합병(M&A) 환경도 개선됐다. 회사를 매각할 때 내야 하는 증여세 등 각종 세금을 크게 줄였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M&A를 활성화하기 위해 지금보다 증여세와 양도세 부담을 크게 낮춰야 한다”며 “창조경제를 외치면서 기업이 창출한 무형가치를 세금으로 걷어가겠다는 것은 ‘난센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처럼 회사를 팔고 난 사람이 또 다른 회사를 차려 도전에 나서고, 후배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쉬운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를 통과시키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명문장수기업 확인제도는 고용 창출 등에 기여한 장수기업에 세제 혜택 및 R&D 지원 혜택을 주는 것이다. 한 전 청장은 “장수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법인데 ‘부자감세’ 논란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정책 전반에 대해서는 “사회 전반의 의식개혁 없이 중소기업 발전을 얘기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말했다. 그는 “상생(相生)정신과 같은 사회적 합의가 자리잡아야 중소기업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약력 △1954년 광주 출생 △1973년 중앙고 졸업 △1977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3년 미국 조지아대 경영대학원(MBA) 졸업 △1988년 미 조지아대 경영학 박사 △1989년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1999년 한국벤처연구소 소장 △2005년 한국중소기업학회회장 △2010년한국인사조직학회회장 △2013년중소기업청장

김용준/이현동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