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김동완 전 기상청 통보관 "요즘 예보 슈퍼컴퓨터 의존 지나쳐…숙련·경험 쌓인 예보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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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기상캐스터 김동완 전 기상청 통보관
"'생활 일기예보' 인기 치솟을 땐 이병철 회장이 백지수표까지 제시"
"불쾌지수가 높은 날입니다. 감정 조절에 유념하세요"
"미니스커트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입니다"
"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라고 합니다"
"'생활 일기예보' 인기 치솟을 땐 이병철 회장이 백지수표까지 제시"
"불쾌지수가 높은 날입니다. 감정 조절에 유념하세요"
"미니스커트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입니다"
"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라고 합니다"
1958년 서울대 사범대 입학시험보러 상경했다가 관상대 시험에 덜컥 합격
50년 후 한국 일기예보의 살아있는 전설로
1976년 어린이날에 화창한 날씨 예보했다가 ‘비’…한동안 고개 못 들어
2000년에 인기만 믿고 국회의원 출마했다 낙마
전 재산 30억 날렸지만 실패 통해 많이 배워
요즘 기상캐스터들 날씨 예보보다는 외모에 더 관심 아쉬워
1958년 겨울. 대구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신문을 읽던 20대 초반 청년의 눈에 한 채용공고가 들어왔다. 국립중앙관상대(현 기상청)의 신입직원 채용 공고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군 복무를 선택한 터였다. 몇 달 전 군복무를 마친 뒤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는 길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치른 관상대 시험에 덜컥 합격, 고민에 빠졌다. 대학 진학과 관상대 직원의 갈림길에서 청년은 후자를 택했다. 50여년 뒤 백발의 노인이 된 그 청년은 한국 일기예보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국내 원조 기상캐스터로 불리는 김동완 전 통보관(80) 얘기다. 서른 살이 넘은 국민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김 전 통보관의 일기예보를 뉴스에서 들었을 정도다. 구수하고 정감있는 일기예보로 많은 인기를 누린 그를 지난 19일 서울 신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방송사서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 났었죠”
이날 만난 김 전 통보관은 과거 방송 출연 때와 달리 다소 수척한 모습이었다. 최근 하지정맥류 증상 탓에 다리가 아파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도 오전에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 사진 촬영을 한사코 사양했다. 수척해진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기자와 2년 전 인터뷰했을 당시 촬영한 사진을 써달라고 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는데 요새 들어 건강이 좀 안 좋아졌어요. 다리가 아프다 보니 좋아하는 등산도 못 다닙니다.”
관상대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가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가 방송에 처음 출연한 건 1965년. “당시엔 지금처럼 기상캐스터가 없어서 관상대 직원들이 뉴스 말미에 직접 날씨예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 모두 방송에 나가는 걸 기피했어요. 어쩌다 보니 경상도 사투리 쓰는 제가 뽑히게 된 거죠.”
김 전 통보관의 일기예보가 시청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생활 기상예보’ 덕분이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입니다. 감정 조절에 유념하세요’ ‘미니스커트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입니다’ ‘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라고 합니다’ 등 귀에 쏙 들어오는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1965년은 TV 없이 라디오만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뉴스에서 ‘날씨 예보가 이어지겠습니다’고 나오면 곧바로 다른 방송으로 돌리던 때였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국민이 일기예보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생활 예보’를 생각하게 됐지요.”
인기가 날로 치솟다 보니 당시 방송사에서 김 전 통보관만 날씨예보를 하게 해 달라고 기상청에 부탁할 정도였다. 1970년대 초반 TBC(동양방송)에서는 일기예보를 뉴스 뒤에 붙이지 않고, 독립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별도 편성했다. 방송사의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했다. KBS와 MBC에서는 김 전 통보관을 전속 캐스터로 영입하기 위해 관상대 연봉의 세 배를 주겠다고 했다. 당시 이병철 TBC 회장은 그를 붙잡기 위해 백지수표와 함께 10년 종신이사직을 제시하기도 했다.
“제가 왜 김동완 통보관이라고 불리는 줄 압니까? 사무관 시절 일기예보를 할 때 항상 ‘기상대의 김동완 사무관입니다’ 혹은 ‘김동완 계장입니다’라고 했는데 방송사에서 어감이 안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송사에서 통보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어요. 그런데 통보관이 나중엔 기상청의 공식 직급이 됐습니다.” 현재 기상청 사무관(5급)은 통보관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1976년 어린이날 오보가 기억에 남아”
그는 기상청 예보과장으로 일하던 1982년에 24년간 몸담았던 기상청을 떠나 MBC 보도위원(부장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사표를 내자 과학기술부 장관이 불러 당장 예보국장을 시켜줄 테니 방송사로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글쎄…기상청에 계속 있었다면 기상청장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저는 기상청에서 벌어지는 헐뜯기 경쟁이나 시기 섞인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장관에게 ‘그냥 때려치우겠습니다’고 했지요.”
그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MBC 기상캐스터로 근무했다. 기상청 시절까지 합쳐 30년이 넘는 일기예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뭘까. “1976년의 어린이날 날씨 오보를 잊을 수가 없어요. 어린이날 아침에 자신있게 ‘오늘은 어린이들의 얼굴만큼이나 해맑은 날씨가 계속되겠습니다’라고 예보했는데 방송사를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지는 거예요. 효창공원에서 대대적으로 예정돼 있던 어린이날 행사는 비 때문에 취소됐지요. 길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비난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걸리더라고요. 한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김 전 통보관은 정치인과도 인연이 많다. 그는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한 달에 두 번 정도 청와대에 들어가 날씨 브리핑을 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구공고 2년 후배다.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은 전 전 대통령과 만났어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총알(돈)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김 전 통보관은 2000년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20년 넘게 인연을 맺은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의 권유 때문이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기상청과 방송활동 내내 모은 전 재산 30억원도 이때 모두 날렸다. “너무 순진했어요. 김천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텃밭인데도 모든 국민이 나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하지만 절대 후회하진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뭔가 배웠다고나 할까요.”
“20년 이상 경험 쌓은 인력이 예보관 돼야”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이 생소하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들어선 젊은 여성들에게 기상캐스터는 선망의 직업이 됐다. 인기 기상캐스터들이 연예계로 진출하는 경우도 흔하다. 김 전 통보관은 자신이 국내 기상캐스터 1호로 불리는 게 전혀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기상예보 전문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차분히 인터뷰를 이어가던 김 전 통보관의 목소리가 이때부터 높아졌다.
“요새 기상캐스터는 일기예보보다는 옷차림과 외모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일기예보 전문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시청자들도 젊은 기상캐스터 외모와 옷차림만 보고 정작 날씨예보는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 날씨예보는 지금보다 정확했는데…’라며 김 전 통보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기상청의 예보는 선진국 수준입니다. 예보 정확도가 90%를 넘는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날씨라는 게 워낙 예측 불가능하거든요.”
다만 그는 기상청 예보에 대해 반드시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예보관들이 요새 지나치게 슈퍼컴퓨터에만 의존해요. 판단은 결국 예보관이 하는 겁니다. 예보는 기술이고, 기술은 숙련과 경험이 쌓여야 해요. 2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인력이 예보관이 돼야 하는데 요새는 고된 업무 탓에 예보관을 기피하고 ‘잘나가는’ 다른 부서를 선호하지요. 그래서 예보관에겐 승진이나 임금 등의 인센티브를 많이 줘야 합니다. 이건 제가 기상청에 근무하던 시절에도 문제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예요.”
그는 “기상청 예보관들이 반드시 맞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맞히려고 하지 말고 틀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더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최고 기온이 33도인데, 내일은 34도일지 35도일지 헷갈린다고 가정해 보죠. 이럴 경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덥겠습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럼 예보가 틀리지 않는 거죠. ‘반드시 맞혀야 한다’는 스트레스야말로 날씨예보의 가장 큰 적입니다.”
■ 예보관의 세계
전국에 100여명 근무…4명씩 12시간 교대
총괄예보관 5명이 최종회의서 예보 선택
예보관은 기상청의 핵심 보직인 동시에 가장 기피하는 보직이다. 날씨 예보가 주업무인 기상청에서 예보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기상청 본부뿐 아니라 수도권, 부산, 광주, 대전, 강원, 제주 등 6개 지방기상청에도 예보관이 근무하고 있다. 100명이 넘는 예보관 중 핵심 보직은 다섯 명의 총괄예보관(서기관급)이다. 슈퍼컴퓨터에서 나온 다양한 시나리오 중 총괄예보관 다섯 명의 회의를 거쳐 최종 선택된 것이 국민이 접하는 공식 예보다.
총괄예보관실 근무는 네 명이 한 조가 돼 오전 8시와 오후 8시를 기점으로 12시간씩 교대로 돌아간다. 1년 365일 내내 예보상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1주일 간격으로 낮과 밤이 바뀌는 근무 형태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기상청 예보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장마나 태풍이 올 때는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간다. 예보관은 여름철엔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기상청 직원들의 예보관실 평균 근무 경력은 2~3년에 불과하다. 이런 잦은 순환보직 근무 시스템으로 예보관의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예보관의 고된 업무 강도를 고려해 승진이나 임금 등의 추가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
50년 후 한국 일기예보의 살아있는 전설로
1976년 어린이날에 화창한 날씨 예보했다가 ‘비’…한동안 고개 못 들어
2000년에 인기만 믿고 국회의원 출마했다 낙마
전 재산 30억 날렸지만 실패 통해 많이 배워
요즘 기상캐스터들 날씨 예보보다는 외모에 더 관심 아쉬워
1958년 겨울. 대구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서 신문을 읽던 20대 초반 청년의 눈에 한 채용공고가 들어왔다. 국립중앙관상대(현 기상청)의 신입직원 채용 공고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미루고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군 복무를 선택한 터였다. 몇 달 전 군복무를 마친 뒤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기 위해 서울대 사범대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는 길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치른 관상대 시험에 덜컥 합격, 고민에 빠졌다. 대학 진학과 관상대 직원의 갈림길에서 청년은 후자를 택했다. 50여년 뒤 백발의 노인이 된 그 청년은 한국 일기예보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국내 원조 기상캐스터로 불리는 김동완 전 통보관(80) 얘기다. 서른 살이 넘은 국민은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김 전 통보관의 일기예보를 뉴스에서 들었을 정도다. 구수하고 정감있는 일기예보로 많은 인기를 누린 그를 지난 19일 서울 신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방송사서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 났었죠”
이날 만난 김 전 통보관은 과거 방송 출연 때와 달리 다소 수척한 모습이었다. 최근 하지정맥류 증상 탓에 다리가 아파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도 오전에 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 사진 촬영을 한사코 사양했다. 수척해진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기자와 2년 전 인터뷰했을 당시 촬영한 사진을 써달라고 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는데 요새 들어 건강이 좀 안 좋아졌어요. 다리가 아프다 보니 좋아하는 등산도 못 다닙니다.”
관상대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가 방송에 출연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그가 방송에 처음 출연한 건 1965년. “당시엔 지금처럼 기상캐스터가 없어서 관상대 직원들이 뉴스 말미에 직접 날씨예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직원들 모두 방송에 나가는 걸 기피했어요. 어쩌다 보니 경상도 사투리 쓰는 제가 뽑히게 된 거죠.”
김 전 통보관의 일기예보가 시청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생활 기상예보’ 덕분이었다. ‘불쾌지수가 높은 날입니다. 감정 조절에 유념하세요’ ‘미니스커트를 입기에는 추운 날씨입니다’ ‘장마는 나이 많은 아내의 잔소리라고 합니다’ 등 귀에 쏙 들어오는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1965년은 TV 없이 라디오만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뉴스에서 ‘날씨 예보가 이어지겠습니다’고 나오면 곧바로 다른 방송으로 돌리던 때였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국민이 일기예보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을까 고민했고, ‘생활 예보’를 생각하게 됐지요.”
인기가 날로 치솟다 보니 당시 방송사에서 김 전 통보관만 날씨예보를 하게 해 달라고 기상청에 부탁할 정도였다. 1970년대 초반 TBC(동양방송)에서는 일기예보를 뉴스 뒤에 붙이지 않고, 독립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별도 편성했다. 방송사의 스카우트 경쟁도 치열했다. KBS와 MBC에서는 김 전 통보관을 전속 캐스터로 영입하기 위해 관상대 연봉의 세 배를 주겠다고 했다. 당시 이병철 TBC 회장은 그를 붙잡기 위해 백지수표와 함께 10년 종신이사직을 제시하기도 했다.
“제가 왜 김동완 통보관이라고 불리는 줄 압니까? 사무관 시절 일기예보를 할 때 항상 ‘기상대의 김동완 사무관입니다’ 혹은 ‘김동완 계장입니다’라고 했는데 방송사에서 어감이 안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방송사에서 통보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줬어요. 그런데 통보관이 나중엔 기상청의 공식 직급이 됐습니다.” 현재 기상청 사무관(5급)은 통보관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1976년 어린이날 오보가 기억에 남아”
그는 기상청 예보과장으로 일하던 1982년에 24년간 몸담았던 기상청을 떠나 MBC 보도위원(부장직)으로 입사했다. 당시 사표를 내자 과학기술부 장관이 불러 당장 예보국장을 시켜줄 테니 방송사로 가지 말라고 설득했다. “글쎄…기상청에 계속 있었다면 기상청장은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저는 기상청에서 벌어지는 헐뜯기 경쟁이나 시기 섞인 분위기가 싫었습니다. 장관에게 ‘그냥 때려치우겠습니다’고 했지요.”
그는 1982년부터 1997년까지 MBC 기상캐스터로 근무했다. 기상청 시절까지 합쳐 30년이 넘는 일기예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뭘까. “1976년의 어린이날 날씨 오보를 잊을 수가 없어요. 어린이날 아침에 자신있게 ‘오늘은 어린이들의 얼굴만큼이나 해맑은 날씨가 계속되겠습니다’라고 예보했는데 방송사를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지는 거예요. 효창공원에서 대대적으로 예정돼 있던 어린이날 행사는 비 때문에 취소됐지요. 길거리에서 얼굴을 알아보고 비난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이 걸리더라고요. 한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김 전 통보관은 정치인과도 인연이 많다. 그는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한 달에 두 번 정도 청와대에 들어가 날씨 브리핑을 했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구공고 2년 후배다. “예전엔 한 달에 한 번은 전 전 대통령과 만났어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총알(돈)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김 전 통보관은 2000년 고향인 경북 김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20년 넘게 인연을 맺은 김종필 당시 자민련 총재의 권유 때문이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기상청과 방송활동 내내 모은 전 재산 30억원도 이때 모두 날렸다. “너무 순진했어요. 김천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텃밭인데도 모든 국민이 나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하지만 절대 후회하진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뭔가 배웠다고나 할까요.”
“20년 이상 경험 쌓은 인력이 예보관 돼야”
기상캐스터라는 직업이 생소하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들어선 젊은 여성들에게 기상캐스터는 선망의 직업이 됐다. 인기 기상캐스터들이 연예계로 진출하는 경우도 흔하다. 김 전 통보관은 자신이 국내 기상캐스터 1호로 불리는 게 전혀 달갑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기상예보 전문가로 불러달라고 했다. 차분히 인터뷰를 이어가던 김 전 통보관의 목소리가 이때부터 높아졌다.
“요새 기상캐스터는 일기예보보다는 옷차림과 외모에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일기예보 전문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시청자들도 젊은 기상캐스터 외모와 옷차림만 보고 정작 날씨예보는 제대로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거 날씨예보는 지금보다 정확했는데…’라며 김 전 통보관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기상청의 예보는 선진국 수준입니다. 예보 정확도가 90%를 넘는다는 건 대단한 거예요. 날씨라는 게 워낙 예측 불가능하거든요.”
다만 그는 기상청 예보에 대해 반드시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예보관들이 요새 지나치게 슈퍼컴퓨터에만 의존해요. 판단은 결국 예보관이 하는 겁니다. 예보는 기술이고, 기술은 숙련과 경험이 쌓여야 해요. 2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인력이 예보관이 돼야 하는데 요새는 고된 업무 탓에 예보관을 기피하고 ‘잘나가는’ 다른 부서를 선호하지요. 그래서 예보관에겐 승진이나 임금 등의 인센티브를 많이 줘야 합니다. 이건 제가 기상청에 근무하던 시절에도 문제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예요.”
그는 “기상청 예보관들이 반드시 맞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맞히려고 하지 말고 틀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더 정확한 예보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최고 기온이 33도인데, 내일은 34도일지 35도일지 헷갈린다고 가정해 보죠. 이럴 경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덥겠습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럼 예보가 틀리지 않는 거죠. ‘반드시 맞혀야 한다’는 스트레스야말로 날씨예보의 가장 큰 적입니다.”
■ 예보관의 세계
전국에 100여명 근무…4명씩 12시간 교대
총괄예보관 5명이 최종회의서 예보 선택
예보관은 기상청의 핵심 보직인 동시에 가장 기피하는 보직이다. 날씨 예보가 주업무인 기상청에서 예보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기상청 본부뿐 아니라 수도권, 부산, 광주, 대전, 강원, 제주 등 6개 지방기상청에도 예보관이 근무하고 있다. 100명이 넘는 예보관 중 핵심 보직은 다섯 명의 총괄예보관(서기관급)이다. 슈퍼컴퓨터에서 나온 다양한 시나리오 중 총괄예보관 다섯 명의 회의를 거쳐 최종 선택된 것이 국민이 접하는 공식 예보다.
총괄예보관실 근무는 네 명이 한 조가 돼 오전 8시와 오후 8시를 기점으로 12시간씩 교대로 돌아간다. 1년 365일 내내 예보상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1주일 간격으로 낮과 밤이 바뀌는 근무 형태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기상청 예보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장마나 태풍이 올 때는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간다. 예보관은 여름철엔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기상청 직원들의 예보관실 평균 근무 경력은 2~3년에 불과하다. 이런 잦은 순환보직 근무 시스템으로 예보관의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예보관의 고된 업무 강도를 고려해 승진이나 임금 등의 추가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