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석유화학 업계에 대한 선제적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업계에선 오히려 일부 품목에 대한 증설 경쟁을 펼치고 있다. 자칫하면 2012~2013년 이뤄진 대규모 증설 여파로 가격이 40% 폭락해 곤경에 처해있는 테레프탈산(TPA) 제조업체들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공급과잉 경고에도 유화업계 증설 경쟁…'TPA 악몽' 재연되나
프로필렌옥사이드(PO) 설비 증설 경쟁

국내 기업 간 증설 경쟁이 붙은 대표적 품목은 PO다. PO는 자동차 내장재 등에 쓰이는 폴리우레탄의 원재료다. 국내에선 SKC가 연간 30만t(지난해 1조300억원 규모)을 독점적으로 생산해왔다.

하지만 2018년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최근 울산 온산공장에 잔사유(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가스와 휘발유, 경유를 분리하고 남은 찌꺼기) 분해시설 등을 짓기 위해 4조7890억원을 투자하기로 확정한 에쓰오일이 2018년부터 이곳에서 PO를 생산할 예정이다. 에쓰오일 온산공장이 계획 중인 PO 생산 규모는 연 30만t이다. 또 다른 정유업체도 PO 시장에 신규 진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SKC도 연간 생산 규모를 2018년까지 70만t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SKC는 독일 바스프, 벨기에 솔베이와 함께 울산 PO 공장에 약 1조원을 투자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현재 적정 투자비 및 생산 규모 산출 등을 위한 막바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증설이 마무리되면 두 회사의 생산량만으로 국내 연간 소비량(60만t)을 훌쩍 뛰어넘는다. 중국 석유화학 업체들의 증설까지 감안하면, 2018년을 기점으로 PO 가격이 약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예측이다.

아크로릴로니트릴(AN)도 과잉 공급

최근 정부가 석유화학산업의 선제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밝히면서 그 대상으로 지목한 품목들은 TPA, 폴리스티렌(PS) 등이다. 두 석유화학 제품은 각각 연간 국내 생산량이 534만t과 102만t으로, 수요량인 102만t과 50만t을 초과하고 있다.

이들 품목 외에도 공급과잉 상태인 석유화학 제품은 많다. 탄소섬유 등의 재료로 쓰이는 AN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는 동서석유화학과 태광산업이 각각 연 56만t과 29만t의 AN을 생산하고 있지만 최근 몇 년간 시노펙 등 중국 업체들이 잇따라 생산 규모를 늘렸다. 2010년 연평균 t당 254만원이었던 AN 가격은 올해 156만원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상하이 석유화학, 스위스 이네오스 등이 2017년까지 추가 증설을 예고해 만성적 공급과잉 상태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는 구조조정에 소극적

정부는 최근 석유화학 업계가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며 구조조정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섰다. 구조조정을 통해 스페셜티 케미컬(고부가가치 정밀화학) 중심으로 산업을 재편한 일본의 선례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일본은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을 추진해 중국과 경쟁하는 범용 석유화학 제품의 일본 내 생산을 전면 포기했다. 올 들어 스미토모가 연 38만t 규모의 에틸렌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을 중지한 데 이어 아사히-카세이는 내년까지 연 생산량 44만t 규모의 NCC 가동을 멈출 계획이다.

그러나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목된 기업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최근 한 행사에서 “조선산업은 플레이어(참여 회사)를 줄이면서 조선사 간에 중복되는 부분을 정리해야 하고, 철강의 전기로와 합금철, 석유화학은 TPA 등의 조정이 필요하다”며 “기업들이 구조조정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나는 안 된다’는 입장이어서 조율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국석유화학협회가 중심이 돼 주요 석유화학 기업 임원 및 실무자들이 참여해 최근 구성했던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민간협의체’는 담합에 대한 우려 등으로 한 차례 모임을 한 뒤 만나지 않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해당 분야에 강점을 가진 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종현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