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아닌(無印) 라이프 스타일을 팔자"…일본 슈퍼마켓의 역발상, 기업 가치를 바꾸다
1980년 일본 슈퍼마켓 체인점인 세이유는 ‘브랜드 없는 상품’ 전략을 시작했다. 잡화 9가지, 식품 31가지가 대상이었다. 그 가운데 히트한 상품은 ‘조각난 말린 표고버섯’이었다. 부서졌기 때문에 출하 과정에서 상품 가치가 없다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맛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표고버섯의 가치는 모양이 아니라 맛에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점(예쁜 모양)을 배제하면 훨씬 저렴하게 팔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브랜드가 아닌(無印) 라이프 스타일을 팔자"…일본 슈퍼마켓의 역발상, 기업 가치를 바꾸다
이것이 현재 26개국에 702개 점포(2월말 기준)를 거느리고 연간 2206억엔 매출(영업기준, 2014년)에 209억엔 영업이익을 내는 ‘무인양품(無印良品)’의 시작이었다. 무인양품은 ‘브랜드가 없는(No brand) 질 좋은 물건’이라는 뜻이다. 무인양품이 태어난 1980년대는 일본 경제가 거품에 취해 있던 시기였다. 해외의 고급 브랜드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명품 브랜드를 일본식 한자어로 바꾸면 ‘유인양품(有印良品)’이다. ‘브랜드 있는(有印) 고급(良) 물건(品)’이란 얘기다. 무인양품은 유인양품의 세태에 대한 반격을 담은 조어인 셈이다.

군살 뺀 경영 추구

이 회사는 일본의 거품이 꺼지고 불황이 닥친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이유 있는 저렴함’을 내세워 품질은 좋고 가격은 싼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돈없는 학생 등 일본인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일본 내 점포가 급증하고 영국 런던 등 해외 점포도 잇달아 차렸다. 1999년엔 매출 1066억엔, 경상이익 133억엔을 달성했다.
무인양품 매장 모습.
무인양품 매장 모습.
성장일변도 전략은 2000년대 들어 한계에 처했다. 빠르게 트렌드에 대응하는 셀렉트숍이나 SPA 브랜드에 밀렸다. 매출과 이익이 늘어난 가운데 기업공개(IPO)까지 하자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대형점포를 많이 냈지만 관리는 점장에게 일임하는 주먹구구식 경영이 이뤄졌다. 조직이 비둔해졌고, 2001년에는 적자를 내며 그간의 성공 신화에도 금이 갔다.

이를 해결한 것은 마쓰이 다다미쓰 전 양품계획 회장(현 명예고문)이다. 양품계획은 ‘무인양품’ 브랜드를 운영하는 일본 법인명이다. 그는 주먹구구 경영에 매뉴얼을 도입하고, 구조(시스템)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그의 철학을 반영한 매뉴얼이 ‘무지그램(MUJIGRAM)’이다. 제품·서비스에 관한 노하우를 표준화해서 2000쪽에 걸쳐 정리한 것이다. 13권까지 나왔다. 매장 직원들의 제안을 반영해 계속 업데이트한다.

"브랜드가 아닌(無印) 라이프 스타일을 팔자"…일본 슈퍼마켓의 역발상, 기업 가치를 바꾸다
마쓰이 전 회장의 매뉴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점포를 어디에 내야 할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적은 출점 기준서다. 그는 저서에서 이 출점 기준서를 통해 신규 점포 성공률을 20%에서 80%로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가 말하는 구조는 시스템이다. 마쓰이 전 회장은 “조직의 근간은 구조인데, 구조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으면 부진의 근본 원인이 없어지지 않아 쇠퇴를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성과를 무조건 내라고 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력하면 성과를 내는 구조를 고민하는 사람이 리더”라는 게 마쓰이 전 회장의 지론이다.

‘이것으로도 좋다’ 콘셉트

‘무인양품은 왜 싸지도 않은데 잘 팔리는가’라는 책을 지은 에가미 다카오는 “무인양품이 취급하는 상품은 7000가지 이상이지만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인양품이 ‘단 하나의 상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가 말하는 단 하나의 상품은 ‘무인양품의 생활’, 곧 무인양품이 추구하는 생활이다.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팔고 있다는 뜻이다.

마쓰이 다다미쓰 전 양품계획 회장
마쓰이 다다미쓰 전 양품계획 회장
무인양품의 가게에 가 보면 이 말을 금세 이해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상품을 내세우기보다는 가구와 옷, 문구류 등 각각의 물건들이 일관된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어서다. 무인양품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회성으로 하나의 물건을 사 가기보다는 반복적으로 필요한 제품을 이것저것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

회사가 내세우는 경영철학도 독특하다. 홈페이지에 게시한 경영철학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이래서 좋다’라는 부분이다. 기존 상품들은 주로 ‘이것(우리 상품)이 좋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며 강하게 고객을 유인한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이 제품의 특징은 이러저러하며, ‘이래서 좋다’고 고객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일본어 원문을 살펴보면 ‘이래서 좋다’는 ‘이것으로도 좋다’로 해석할 수 있다. 무인양품 측은 “‘~로도 좋다’는 부분에는 억제와 양보를 포함한 이성적인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고객의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겠다는 특이한 전략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디자인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 △생산과정의 간소화 △소재의 선택 △포장의 간략화 3가지를 실천한다. 화려한 패턴을 담은 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장식은 배제돼 있다.

무인양품의 스타일을 만든 디자이너 하라 겐야는 이러한 철학을 담은 디자인을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이라고 부른다. 그가 새로 만든 말이다. 인포메이션(information·정보)의 접두어 ‘in’을 뺀다는 뜻의 ‘ex’로 갈아끼웠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에 주목하고 인식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발상을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무인양품은 ‘~으로도 좋다’는 상품 콘셉트를 철저히 추구한다. 상품 기획과정까지는 사내에서 하지만, 진짜 상품화 여부는 프로젝트 디자이너와 그래픽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 디자이너 등으로 구성된 외부 고문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왜 이 상품을 무인양품에서 팔아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상품은 충분히 품질이 좋고, 사용하기 편리하며, 가격이 적절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때론 그 가격이 실제 시장의 다른 상품보다 비싼 경우도 있지만,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바로 이 ‘기분’이 무인양품의 성공을 설명해 준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