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老)기업인 장치혁의 '20년 열정'…러시아 '교육한류' 꽃 피웠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국립극동대에선 2일 흥겨운 사물놀이 공연이 한바탕 벌어졌다. 꽹과리와 북 등을 신명나게 연주한 사람들은 파란 눈의 러시아인들이었다. 이들은 국립극동대 한국학대학 사물놀이 동아리 ‘해동’의 단원으로 단과대학 설립 2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멋들어지게 해냈다.

세르게이 이바네츠 국립극동대 총장은 한국학대학 2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학대학은 1995년 설립된 뒤 한국과 러시아를 이어주는 2000여명의 인재를 키워냈다”며 “20년 전 150만달러(약 18억원)를 기증하며 학과 설립을 요청했던 장치혁 고려학술문화재단 회장(83·전 고합그룹 회장·사진)의 선견지명으로 한·러 교류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20년간 졸업생 2000명 배출

장치혁 회장은 한·러 민간외교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돼 굳게 잠겼던 러시아 시장 문이 열리자 장 회장은 연해주를 주목했다. 연해주가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관문으로 태평양과 유럽을 잇는 세계화 시대의 중심 허브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 회장은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925㎢(약 2억8000만평)에 달하는 농장을 조성했다. 1994년 대홍수 때는 30여만달러를 러시아에 지원했다. 장 회장의 노력은 닫혀 있던 러시아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러시아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시로부터 각각 우호훈장과 명예시민증을 받을 정도로 공로도 인정받았다.

노(老)기업인 장치혁의 '20년 열정'…러시아 '교육한류' 꽃 피웠다
하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현지엔 한국을 이해하는 인력이 부족했다. 반세기 가까이 교류가 없다보니 사고방식이 달랐다.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두 나라 관계가 발전하기 위해선 사람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1995년 설립된 것이 국립극동대 한국학대학이다. 세계 최초의 한국학 단과대학으로 한국어학과, 한국역사학과, 한국경제학과 등 3개 학과를 두고 있다. 5년제 정규대학으로 2000여명이 이곳을 졸업했다. 현재 재학생은 115명이다.

장 회장은 “21세기 역사는 협력시대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협력기반 조성의 첫걸음은 양국의 문화와 언어를 잘아는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가능할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한국학대학 졸업생들은 연해주 사회를 이끌고 있다. 연해주정부 부지사도 배출했다. 4명의 졸업생이 국장급으로 일하고 있다. 양기모 KOTRA 블라디보스토크무역관장은 “현대중공업, 대한항공 등 연해주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물론 러시아 현지 기업 임원으로도 한국학대학 출신들이 활동하고 있다”며 “20년 전 시작된 교육 한류의 씨앗이 열매를 맺었다”고 평가했다.

○10년 전부터는 발해연구소도 운영

장 회장과 연해주의 인연은 그의 부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회장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단국대 설립자인 산운 장도빈 선생이다. 그는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냈으며,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2년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극동연방대는 이를 기리기 위해 이날 ‘산운기념관’을 세웠다.

장 회장은 부친과 연해주의 이런 인연을 살려 한국과 러시아 간 학술문화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앞장섰다. 연해주 일대 발해 유적지 조사 및 보존사업을 지원했다. 2005년에는 한국학대학과 함께 발해연구소를 세워 학술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장 회장은 “연해주야말로 20세기 국가주의를 탈피해 미래지향적 공존과 번영을 꿈꾸는 경계 없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며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유라시아철도가 부산까지 닿는 날이 오도록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