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간 줄서기에 이튿날 티켓도 기약없어…승객들 '분통'
항공사 '부실' 서비스에 "연방항공청 문제" 책임 떠넘기기


"죄송합니다만, 항공 레이더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비행편을 취소합니다"

미국 동부시각으로 15일(현지시간) 오후 2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국제공항(MIA)에서 미국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DA)으로 향하는 한 유명 항공사의 여객기 기장이 이륙 직전 느닷없이 통보한 말이다.

좌석에 착석한 채 이륙에 대비하고 있던 승객들 사이에서는 이곳저곳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탄성과 한숨이 섞여나왔다.

그때만 해도 승객 대다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겪을 '고난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항공기를 걸어나온 수백명에 달하는 승객들은 그 항공사의 '재예약 센터'(Rebooking Center)로 안내된 뒤 최소 서너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도 번호표를 나눠주고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게 하기는커녕 그대로 선 채로 대기시켰다.

승객들 사이에서는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불만과 짜증이 터져나왔다.

비상상황임에도 항공사 직원 고작 두세명이 무려 수백명을 상대로 수속절차를 밟다보니 시간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타는 오후 6시가 다 돼서 한 여직원이 마이크로폰으로 알린 내용이었다.

"오늘은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편이 없습니다. 내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월요일 저녁때나 돼야 좌석이 생긴다"라는 말에 승객들은 그야말로 '멘붕'이 됐다.

중요한 사업차 워싱턴DC로 올라가야 한다는 40대의 중국계 미국인 사업가는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면서 "그게 무슨 소리냐"며 직원에게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30대 여성은 "오늘 올라가지 못하면 저 직장에서 해고될지도 몰라요"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 20대 여대생은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인지 울음을 터뜨렸다.

일단 승객들 대부분은 혹시나 하는 기대 속에서 '스탠바이 티켓'(예약돼있지 않고 빈자리가 생겼을 경우에만 탑승할 수 있는 티켓)을 받고는 오후 8시로 출발이 예정된 항공기 수속을 밟는 탑승구로 향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모두에게 허사였다.

한 두자리를 빼고는 예약한 승객들이 모두 탑승한 것이었다.

실망한 승객들이 받은 또다른 충격은 이튿날 비행편도 대부분 예약이 끝나 또다시 스탠바이 티켓을 받아가라는 항공사측의 말이었다.

언제 티켓을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태에서 공항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 승객은 "무슨 서비스가 이렇게 형편이 없냐"며 "숙박이라도 제공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자 한 직원은 "내가 얘기해줄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좌석이 없다는 것 밖에 없다"고 쌀쌀맞게 말했다.

저녁식사 조차 거른 대부분의 승객들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공항 대합실에 여기저기 흩어졌다.

워싱턴 덜레스 공항 근처에 사는 한 승객은 "이럴 바에는 비행티켓을 포기하고 15시간 걸리더라도 차를 렌트해 가는게 좋겠다"고 투덜거렸다.

이날 미국 인터넷에 등장한 화제의 용어는 "flypocalypse"(fly와 apocalypse의 합성어). 말 그대로 '공항 대재앙'이다.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 재개설 행사 취재차 쿠바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직접 체험한 미국 항공서비스의 '구멍'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조어로 여겨진다.

미국 버지니아주 항공통제센터 프로그램이 갑작스럽게 다운되면서 빚어진 이번 사태는 미국 전역의 항공시스템을 일대 마비 상태에 빠뜨렸다.

미국인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용하는 워싱턴DC와 뉴욕의 주요 공항에서 항공기 이착륙이 금지되면서 그 여파가 미국 동부로부터 시작해 미국 전체로 파급된 것이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은 긴급히 항공사들에 워싱턴DC 일대의 공항을 경유해 운항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불과 두시간여만에 시스템은 복구됐지만 수많은 비행편의 운항이 취소되거나 지연된데 따른 여파로 각 공항은 '혼돈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비행이 취소된 엄청난 수의 승객들이 밤늦도록 항공편을 구하지 못해 극심한 불편과 혼선을 겪어야 했다.

이번 사고로 대체 얼마나 많은 비행편이 취소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백편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시간으로 비행상황을 알려주는 웹사이트인 '플라이트 어웨어'(FlightAware)에 따르면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편의 대부분이, 로널드 레이건 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편의 30%, 볼티모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편의 18%가 각각 취소됐다.

승객들의 원성이 극심했던 마이애미 공항의 경우에는 35%가 이륙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사고의 후속대응을 놓고 항공사와 연방항공청이 협조하기는커녕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하며 '면피'하는데만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항공사들은 이번 사고를 공항 자체나 연방항공청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한 항공사 직원은 "이것은 천재지변과 같은 일이어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다"며 "승객들은 호텔도 잡아주고 식사도 달라고 하지만 우리 정책으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방항공청은 미국 언론에 "이미 오후 4시30분께 시스템이 복구됐다"며 "그 이후에 승객들의 불편과 혼란을 해결해주는 것은 항공사의 몫"이라고 밝히고 있다.

연방항공청은 이날 오후 9시30분 기술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고 현재 워싱턴DC 일대 공항의 이착륙이 거의 정상화됐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번 사고를 놓고 항공사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항공선진국을 자임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서비스의 수준이라는 느낌이 든다.

백인인 50대의 여승객은 "폭풍우로 인해 공항에 발이 묶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비참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며 "히스패닉인 항공사 직원이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인종차별 행위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승객이 모욕감과 좌절을 느낄 정도의 서비스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마이애미<美플로리다주>연합뉴스) 노효동 특파원 r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