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정치인, 사회 운행에 대한 이해부터 다져라
영화 ‘국제시장’은 1960~1970년대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고되게 일했던 기억과 성공담을 함께 그렸다. 영화 ‘변호인’은 과거 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의뢰인을 위해 열심인 변호사 모습을 담았다.

사람들은 종종 지나간 삶의 궤적을 반추한다. 힘들었지만 희망 넘쳤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미소 짓기도 하고, 과거의 성취를 넘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한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과거를 회고하는 횟수만 잦아질 뿐 과거로부터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제시장’과 ‘변호인’도 미래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는 되지 못하고 과거사를 둘러싼 좌우 이념 논쟁의 불씨만 지폈다. 좀 더 생산적이고 높은 수준의 논의가 실종된 한국의 미래가 걱정되는 이유다.

한 사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사회의 운행 질서에 대한 사상과 철학적 토대가 탄탄해야 하고, 정치가 이를 실천해야 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사상과 철학이고, 단기적으로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스스로 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정치 일선에서 이를 실천함으로써 도탄에 빠졌던 영국을 재건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역시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국의 중흥을 선도했다. 영국과 미국의 행운이다. 반면에 30여년 전 복지 포퓰리즘의 씨앗을 뿌렸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전 그리스 총리는 오늘의 그리스 사태를 낳았다. 그리스의 불행이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나침반도 없이 바다 어디쯤에 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한 조각 배와 같은 모습이다. 정치권에는 도무지 기대할 것이 없는 형국이다. 잔뜩 벌여놓은 복지정책의 뒷마무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뒷마무리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른바 ‘사회적 경제’로 정녕 사람들의 삶과 나라의 안녕을 꾀할 수 있는 것인가. ‘소득주도 성장론’은 또 무슨 허황된 이론에 근거한 것인지. 정치권에선 이해할 수 없는 정책만 남발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사회 질서의 형성·유지·운행에 대한 튼튼한 이론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사색하는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까. 있다면 그런 정치인이 선도적 위치에 설 수 있는 환경일까. 선거에서 표를 모으기 위해선 때론 정치 공학도 필요하겠지만, 지적 토대 없이 그런 일에만 집중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없고 정권도 단명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근시안적이며 단기적으로는 무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과 정당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식별도 불가능한 대중이라면 그리스처럼 추락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건 나라의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좌와 우를 떠나 튼튼한 사상 체계를 갖춘 다수의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쓸모 있는 논의가 시작될 수 있다. 수준 높은 논리를 바탕으로 토론을 거쳐 합의를 도출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적 토대가 공고해져야 한다. 합의의 방향은 물론 개인의 자유와 세상의 항구적인 평화를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의 길이어야 한다. 각 나라의 역사는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람들이 매번 실망하면서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정치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향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의 책임은 막중할 수밖에 없다.

시절이 어려울 때면 가끔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을 상상하기도 하는 법. 나다니엘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어니스트가 꿈꾸었던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을 기다리는 것은 한낱 망상에 그칠 것인가. 정치인들은 먼저 인간 사회가 돌아가는 질서에 대한 이해를 탄탄하게 다지기 바란다.

김영용 < 전남대 교수·경제학 yykim@chonna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