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재판이 계속 진행 중이어서 사건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
지난해 말 대법원 국정감사장에서 오간 대화 내용이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서 1심 재판부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자 임내현 의원은 박병대 처장에게 ‘판결이 잘못됐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로 몰아세웠다. 대법원 국정감사가 열릴 때마다 이런 장면이 흔히 목격된다. 헌법이 정한 최고법원인 대법원도 재판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하급심 판결에는 관여하지 않는데 엉뚱하게 국회가 나서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지적이다.
국정감사에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김동진 부장판사를 중징계하라고 대법원에 요구했다.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 댓글 사건 1심 재판장이었던 이범균 부장판사를 강하게 비난하는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렸다가 구설에 올랐다. 김 의원은 “어떻게 동료 법관을 저렇게 매도할 수 있느냐”며 “행정처장, 중징계하세요, 중징계! 아시겠어요”라고 호통쳤다. 법관에 대한 징계 역시 국회가 개입할 수 없는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의 고유 권한이다.
재계에서는 국회가 배임·횡령의 양형 기준에 개입하는 것도 사법권 침해의 한 사례로 꼽는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소속 의원들은 횡령·배임액 규모가 5억원 이상일 때 7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해 원천적으로 집행유예를 차단하는 내용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 개정안을 2012년 발의했다.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은 횡령·배임 액수가 300억원 이상일 때 징역 7년 이상을 선고하도록 하는 특경가법 개정안을 2013년 대표 발의했다. 양형 기준 설정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고유 권한이지만 국회가 입법권을 남용해 이를 대신 행사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판사는 “국정감사권과 입법권은 국회에 부여된 정당한 권한이지만 무소불위로 사용하면 재판 공정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