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끼의 소중함' 잊고 살았네
구내식당·버거집 '단골손님'…집밥 먹어본 게 언제인지
5년째 부서 막내
수저 놓고 고기 굽고 "혼자 밥먹어 봤으면…"
차승원처럼 '도전, 차줌마'
퇴근 후엔 요리하는 남자…식단 조절로 몸매 관리도
어디 그뿐인가. 제과점에서 몇 천원이면 사먹을 수 있는 빵을 굽기 위해 임시 화덕을 만들고, 동네 슈퍼에서도 살 수 있는 어묵을 먹기 위해 생선살을 저미고 채소를 썰고 반죽해 기름에 튀긴다. 밥을 짓기 위해선 매운 연기를 맡아가며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것은 기본. 밥 한 끼 먹는 게 그야말로 고행길이다.
우리 시대 보통 직장인 김과장 이대리들의 삼시세끼 풍경은 어떨까.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고, 식사 자리는 즐겁고 유쾌할까. TV 프로그램에서 보듯 힘든 한 끼 때우기는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식사에 대한 고충이 적지 않다고 한다. 김과장 이대리들의 ‘웃픈’(웃기고도 슬픈) 삼시세끼 이야기를 들어봤다.
내가 먹는 게 먹는 게 아니야~
콘텐츠 제작업체에 다니는 김모 대리의 소원은 ‘혼자 밥 먹기’이다. 그는 5년째 부서 막내다. 경기가 어려워진 이후 회사에서 몇 년째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있다. 그는 밥 먹을 때도 부서 막내 노릇을 해야 한다. 식탁에 수저 놓고 물을 따르고 반찬이 떨어지면 리필한다. 5년째 회식 자리에서 고기 굽는 일을 빼먹지 않고 있다. 식사 후 부서원의 다채로운 커피 메뉴를 외우는 일은 일도 아니다. 김 대리는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좀 맘 편히 먹었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한다.
서울 강남에 사무실을 둔 소규모 식품 수입업체에 근무하는 김모씨. 그는 1주일에 사나흘은 강북에 있는 유명 냉면집으로 출근한다. 사장이 냉면 마니아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녁 회식도 냉면집에서 하기 일쑤라는 것. 직원들은 이제 ‘냉’자만 들어도 구역질을 할 지경. 그러나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이 없다. 급기야 김씨는 최근 배앓이를 했다. 사장이 ‘물냉면은 원래 겨울 음식’이라며 최근에도 냉면을 고집했는데 매일 점심 저녁으로 찬 국물을 들이켜다 보니 탈이 난 것.
자의반 타의반 ‘구내식당 단골손님’
대형 정보기술 기업의 김모 대리는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신혼이지만 평일 세 끼를 대부분 회사 식당에서 해결한다. 새벽엔 단잠에 빠져 있고 저녁엔 피로에 지쳐 있는 맞벌이 아내에게 ‘밥 해달라’고 말하기가 엄두가 안 나서다. 회사 구내식당은 무료다. 질도 나쁘지 않다. 아침엔 김밥이나 샌드위치 중에 골라 먹을 수 있고 점심과 저녁엔 세 가지 이상의 메뉴에서 선택할 수 있다. “구내식당을 이용하면 돈도 아끼고 전문 영양사가 짠 건강식단을 매일 챙길 수 있어 좋아요. 요즘엔 주말에도 구내식당 밥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국내 중견 건설사에서 일하는 김모 사원은 이제 입사한 지 6개월 된 신입사원이다. 처음 근무지를 충청도의 한 도로 건설현장으로 배치받은 그는 하루 세끼를 건설회사 직원 및 인부들과 함께하고 있다. 아침과 점심은 현장 식당에서 대부분 해결한다. 현장 식당은 군대와 비슷하다. 은색 쟁반에 밥과 국을 퍼서 담고 반찬 두세 가지를 먹을 수 있다. 김 사원은 이내 반복되는 식단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저녁 때는 현장 동료 몇 명과 함께 갈비나 회 등으로 외식한다. “여자친구도 없다보니 사는 데 낙이 밤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다니는 게 됐습니다. 군대로 돌아온 느낌이에요.”
뜨끈뜨끈한 쌀밥 먹고 싶어요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이모 대리는 요즘 한없이 늘어가는 ‘패스트푸드 살’에 한숨만 푹푹 나온다. 일벌레 박부장이 일감을 많이 따오는 탓에 팀원 6명이 맡은 고객사만 8개다. 한 명이 하나에만 집중해도 어려운 판에 한두 개씩 맡다 보니 제대로 끼니를 챙기기가 버겁다. 아침, 점심을 패스트푸드로 때우기 일쑤다. 저녁도 시간이 없어 ‘밥 버거’를 먹는 때도 있다. “가장 행복한 날은 거래업체 사람들과 식사 미팅을 잡았을 때예요. 적어도 뜨거운 밥은 먹을 수 있잖아요.”
한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먹어야죠
회계법인에 근무하는 정모씨. 원래 증권사에서 근무했지만 자격증뿐 아니라 넓은 인맥, 탁월한 영업능력 등을 인정받아 스카우트됐다. 그가 일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몸매 관리다. 항상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몸매 관리가 필수다. 그는 아침과 저녁 식사는 단백질 위주의 저염식으로 철저하게 관리한다. 점심에도 건강에 좋다는 맛집을 찾아간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식사를 거르거나 대강 때우지 않는다. “먹는 즐거움을 다소 포기했지만 얻는 게 있으니 힘들어도 당분간은 계속 이럴 생각입니다.”
정보기술(IT) 회사에 근무하는 이모씨는 요즘 아침으로 과일을 먹고 있다. 야근 후 피곤함을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근길 집 근처 마트에 들러 떨이로 파는 저렴한 제철 과일을 조금씩 사온 뒤 다음날 아침에 먹기 좋게 다듬는다. 점심은 회사 동료들과 해결하고, 저녁은 다시 집에서 건강식을 해 먹는다. “최근엔 저녁에 사과로 애플파이도 한번 만들어 봤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먹는 것은 챙기면서 일해야죠. 당분간 건강식단을 힘 닿는 데까지 유지해 볼 생각입니다.”
■ 특별취재팀 박수진 산업부 차장(팀장) 안정락(IT과학부) 황정수(증권부) 김은정(국제부) 강현우(산업부) 강경민(지식사회부) 임현우(생활경제부) 김대훈(정치부) 김동현(건설부동산부) 김인선(문화스포츠부) 추가영(중소기업부) 기자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