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팔린 한 채당 500만달러(약 54억원)가 넘는 미국 뉴욕시 맨해튼의 최고급 아파트 중 54%가 껍데기밖에 없는 페이퍼컴퍼니에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소유주를 감추기 위한 이 같은 거래에는 조직범죄 등 각종 불법행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자금도 다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8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맨해튼 타임워너 74층 74B호의 주인은 ‘25CC74B’라는 정체불명의 회사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 추적 결과 2010년에 1565만달러를 주고 이 아파트를 산 실제 주인은 비탈리 말킨 전 러시아 상원의원으로 드러났다. 그는 조직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캐나다 입국이 거부된 인물이다.

타임워너 빌딩뿐만 아니다. 맨해튼의 럭셔리 아파트 대부분이 실제 소유주나 돈을 댄 전주(錢主)가 깊숙이 숨겨져 있다. 계약서상 구매자는 이처럼 껍데기뿐인 장부상 회사들이다. NYT는 지난해 타임워너를 비롯해 트럼프인터내셔널 등 센트럴파크 인근 미드타운의 고가 아파트 60% 이상은 이처럼 실체를 알 수 없는 회사의 소유로 등록돼 있다고 보도했다. 맨해튼 전체로는 고가 아파트의 54%가 페이퍼컴퍼니에 팔렸다. 2008년까지는 39%에 그쳤으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6년 만에 이처럼 급증한 것이다. NYT는 맨해튼에 이런 형태의 서류상 회사들이 줄잡아 200개에 이른다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인 프로퍼티샤크에 따르면 매년 뉴욕시의 최고급 주택시장으로 흘러들어오는 자금은 약 80억달러로 10년 전에 비해 3배로 늘었다. 센트럴파크 인근 6개 초호화 아파트 900채의 가격은 미국 평균 주택 2만채와 맞먹는 액수다. 루디 톤셔 전직 타임워너 빌딩 관리인은 “회사는 어디서 돈이 오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NYT는 맨해튼 부동산 소유주 가운데 외국인 억만장자들의 비중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러시아,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카자흐스탄, 멕시코 등 세계 각국의 정부 고위 인사나 이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이 중에는 금융사기 등 각종 불법행위에 연루된 인물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맨해튼 부동산시장이 출처가 불투명한 해외자금의 세탁 창구로 활용될 수도 있다고 NYT는 분석했다.

매매가 대부분 현금으로 이뤄지는 것도 실소유주를 추적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2011년 타임워너 빌딩의 아파트를 구입한 러시아 자동차 딜러 알렉산드르 바르샤프스키는 2050만달러 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냈다. 부동산 거래 전문회사들도 지난해 중국인 부호들이 맨해튼 고가 아파트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면서 한 채당 1000만달러가 넘는 금액을 현금으로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했다. 은행 대출 정보 자체가 없는 데다 소유주의 서명조차 변호사나 회계사들이 대리로 하기 때문에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하는 해외 구매자들이 늘면서 맨해튼 고가 부동산의 익명 거래는 보편화된 현상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1억달러 넘는 가격에 팔리면서 맨해튼 아파트 최고가 매매가격 기록을 경신한 원(One) 57 빌딩의 펜트하우스 구입자는 뉴욕시 주택장부에 ‘P 89-90 LLC’로 등재돼 있다. 부동산 중개회사인 브라운 해리스 스티븐슨의 홀 윌키 최고경영자는 “맨해튼에서는 고객 보호가 첫 번째”라며 “그렇지 않으면 고객을 유치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NYT는 탈세나 재산 은닉 등을 목적으로 전 세계를 흘러다니는 거대한 자금들이 이름뿐인 회사를 내세워 부동산을 매매하면서 당국의 추적을 피하고 있는데도 미국 정부가 눈을 감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b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