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현대史 '76인의 포로' 씁쓸한 마감
“6·25전쟁과 조국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떠안고 세상을 떠나 안타깝습니다.”

지난 2일 충북 음성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에서 반공포로 출신인 김남수 씨(83)가 숨졌다. 꽃동네에서 생활하는 수천명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그의 인생에는 한국의 아픈 현대사가 투영돼 있어 주위 사람들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그는 6·25전쟁 이후 남과 북을 모두 포기하고 중립국 행을 선택한 ‘76인의 포로’ 가운데 한 명이다. 강원 고성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지자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피신생활을 했다. 그러나 함경남도 원산에서 국군에게 잡히는 과정에서 인민군으로 몰려 포로 신분이 됐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당시 거제 포로수용소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전쟁터보다 더 살벌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조치가 이뤄지자 그를 포함한 76명은 형제끼리 총부리를 들이대는 처참한 전쟁이 싫다며 제3국행을 택했다.

그는 인도 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에 정착했다. 그러나 빈손으로 시작한 타국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을 ‘조센진’이라고 비하하는 일본인을 살해하고 27년간 감옥과 정신감호소 등을 전전했다.

1993년 6월 MBC가 ‘76인의 포로’를 특집방송으로 다루면서 그의 소식이 국내에 알려졌고, 귀환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까지 나서 힘을 보태면서 그는 1994년 2월 석방돼 41년 만에 조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오랜 수용생활 등으로 과대망상증 등 정신질환을 앓는 상태에서 조국으로 돌아온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그를 받아 준 곳은 음성 꽃동네였다. 이후 20여년 동안 꽃동네 요양원 등에서 생활하던 그는 83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꽃동네 한 관계자는 “최근 1~2년은 노환과 치매 등으로 고생했지만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생활했다”며 “한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이제 평안하게 영면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