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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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기기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이모 대리(32)는 올초 부서 회식자리에서 1990년대 복고 열풍의 위력을 확인했다. 팀원들은 평소 회식 2차 고정 코너인 노래방에 갈 때면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은 표정이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차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후배 직원이 90학번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남성그룹 DJ DOC의 ‘런투유’를 부르면서부터다. 처음에는 팀원 몇 명이 가세해 흥을 돋우더니 급기야 노래가 절정에 달하자 팀원 전원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한궤도 ‘그대에게’, 이문세 ‘붉은 노을’, god ‘애수’, 듀스 ‘여름 안에서’, NRG ‘할 수 있어’ 등의 1980, 1990년대 인기곡이 이어지면서 팀원들은 간만에 ‘하나 됨’을 느꼈다는 전언이다.

최근 한 방송사가 1980, 1990년대 인기 연예인들을 불러 모은 주말 쇼 프로그램으로 대히트를 친 후 ‘복고(復古) 열풍’이 재연되고 있다. 다시 찾아온 복고 열풍에 달라진 직장 풍속도를 스케치해봤다.

○‘흐린 기억 속의 그대’로 인기 1순위

지난해 자동차 부품회사에 입사한 박모 사원(26)은 요즘 회식이나 거래처와의 저녁 식사에 빠짐없이 불려 나가는 인기남이 됐다. 비결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 1992년 가수 현진영이 불러 큰 인기를 끌었지만 박 사원과 같은 1989년생이 꿰고 있기엔 무리가 있는 노래다.

박 사원도 대학 재학 때만 하더라도 잘 몰랐던 노래지만 입사를 계기로 변진섭의 ‘그대 내게 다시’, 신승훈의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등 고전 가요를 집중 연마했다. ‘1차 술·2차 노래방’ 공식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회사에서 그의 주가는 치솟았다. “40대 과장, 차장들에게 ‘직장생활 할 줄 안다’는 칭찬까지 받고 있어요. 앞으로는 노래뿐 아니라 90년대 댄스도 배워볼 생각입니다.”

○부원들과 클럽에서 회식까지…

대기업 전자계열사에 근무하는 이모 과장(36)은 최근 팀 동료들과 입사 후 처음으로 홍대 클럽을 다녀왔다. 부장부터 말단 신입사원까지 부서원 전원이 클럽에 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마포에 있는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던 중 ‘토토가’(MBC 무한도전 프로그램 중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코너)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부장과 차장들의 눈빛이 달라지면서 90년대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럽을 가고 싶다고 한 것이다.

부서 총무인 이 과장은 상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부원들을 이끌고 인근 홍대 클럽으로 향했다. 이 클럽은 90년대 히트곡들과 함께 술과 안주를 즐길 수 있고, 나이트클럽처럼 스테이지도 마련돼 있어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곳이다. 팀원들은 귀에 익은 90년대 음악에 맞춰 흥겹게 놀았다. 평소 근엄했던 부장이 가수 터보의 음악에 맞춰 막춤을 추는 진기한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회식은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앞으로 두 달에 한 번 부서원들끼리 이곳에서 회식하기로 했을 정도니까요.”

○“흡연도 되는 당구장에서 만나요”

1990년대 복고 문화는 음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90년 후반께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크래프트로 대표되는 PC방에 밀려 ‘아저씨의 취미’로 전락한 당구장. 하지만 최근 들어 간단한 식사와 음주로 1차를 한 후 2차로 당구장을 가는 문화가 살아나면서 서울 종로와 강남 등 사무실 밀집 지역의 당구장들은 초저녁부터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최근 당구장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흡연 자유구역’이라는 것. 소규모 체육시설인 당구장은 규제에서 벗어난 덕에 당구장을 찾는 직장인이 더욱 늘고 있다.

2년차 사원인 정모씨가 다니는 보험회사에서도 최근 당구 열풍이 불고 있다. 부서의 중추인 과장·차장 선배들과 어울리기 위해 2~3년차 사원들을 중심으로 당구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정씨는 “흡연자들끼리 정보 공유가 쏠쏠하듯 당구장에서 듣는 회사 뒷얘기가 직장 생활에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지나친 복고 했다가는 ‘노땅’ 취급

복고 열풍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복고’는 ‘노땅’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대기업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는 김 과장(38)은 복고 열풍 뉴스에 1990년대 옷차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옷장에서 꺼내든 건 고1 때인 1994년에 구입한 롱코트. 당시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농구대잔치 열풍으로 농구 선수들이 입던 롱코트가 한창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났지만 몇 번 입지 않아 롱코트는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근하면서 롱코트를 입고 간 김 과장은 후배 직원들의 원성과 따가운 시선에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음에도 훤칠한 외모와 남다른 패션감각으로 여직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그였지만 이날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과장님, 그런 옷 입지 마세요. 지금이 1990년대인 줄 아세요.” “완전 노땅 같아요.” 결국 김 과장은 롱코트를 입은 지 하루 만에 다시 옷장에 처박았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