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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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선각자적 식견으로 일찍이 가노(家奴)를 해방했으며,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기로 결심했다.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고 기호흥학회, 서북학회 등에 참여하면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북간도에 사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1년 체포돼 2년6개월간 복역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해 그해 말 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했다. 이듬해 대한정의단을 기반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총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10월 일제가 만주 독립군을 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두산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 10여 차례 교전 끝에 수천~1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일본군을 대파했다. 독립군 출범 후 최대의 전과였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후 독립군은 자중지란에 빠졌고 그는 1930년 1월24일 괴한의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그와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이범석 장군(초대 국무총리)은 “태산과 같은 위엄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혼은 아들·손주(김두한·김을동)에 이어 세쌍둥이를 ‘대한, 민국, 만세’로 이름지은 외증손자 배우 송일국 씨로 이어지고 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북간도에 사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1년 체포돼 2년6개월간 복역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해 그해 말 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했다. 이듬해 대한정의단을 기반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총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10월 일제가 만주 독립군을 치러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두산 청산리 계곡으로 유인, 10여 차례 교전 끝에 수천~1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일본군을 대파했다. 독립군 출범 후 최대의 전과였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 간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후 독립군은 자중지란에 빠졌고 그는 1930년 1월24일 괴한의 흉탄을 맞고 순국했다.
그와 함께 청산리 전투를 이끌었던 이범석 장군(초대 국무총리)은 “태산과 같은 위엄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혼은 아들·손주(김두한·김을동)에 이어 세쌍둥이를 ‘대한, 민국, 만세’로 이름지은 외증손자 배우 송일국 씨로 이어지고 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