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만경영으로 날개 꺾였던 일본항공…'아메바 경영'으로 화려한 飛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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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바 경영=부문별 채산제도>
Best Practice - 일본항공(재팬 에어라인즈)
패전후 1951년 세워진 공기업
일본경제 호황기 비약적 번창
84년 세계 1위 항공사로 등극
政治 낙하산 인사·강성 노조 등
80년대 버블붕괴로 드러난 적폐
2010년 2조엔 부채로 파산신청
'경영의 神' 이나모리 가즈오 영입
회사전체 아메바처럼 쪼갠후
과감히 구조조정·적자노선 폐지
2년 8개월만에 재상장…'재도약'
Best Practice - 일본항공(재팬 에어라인즈)
패전후 1951년 세워진 공기업
일본경제 호황기 비약적 번창
84년 세계 1위 항공사로 등극
政治 낙하산 인사·강성 노조 등
80년대 버블붕괴로 드러난 적폐
2010년 2조엔 부채로 파산신청
'경영의 神' 이나모리 가즈오 영입
회사전체 아메바처럼 쪼갠후
과감히 구조조정·적자노선 폐지
2년 8개월만에 재상장…'재도약'
지난해는 아시아 항공업계에 있어 불운한 한 해였다. 3월 실종된 말레이시아 항공 여객기(MH370)는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고, 다섯 달 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선 또 다른 말레이 항공 여객기(MH17)가 미사일에 격추돼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12월엔 말레이시아 국적의 에어아시아 여객기(QZ8501)가 인도네시아 해상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한국 항공업계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대한항공은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파문에 휩싸여 있고 아시아나항공은 2013년 발생한 샌프란시스코 공항 여객기 불시착 사고로 부과된 인천-샌프란시스코 노선 운항정지 처분을 두고 국토교통부와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유가 하락의 호재에도 항공업계가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러나 저가 항공사들의 약진 등 부정적인 사업환경에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흑자 행진을 달려온 항공사가 있다. 방만 경영으로 도산한 공룡 기업에서 구조개혁의 모범 답안으로 부활한 일본항공(JAL)이다.
방만 경영에 날개 꺾인 JAL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금지됐던 항공사 운영이 1950년 허용되자 항공사 설립을 서두른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선 기간산업인 항공산업 발달이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51년 8월 일본 최초의 항공사인 JAL이 공기업으로 설립된다. JAL은 1960~1980년대 일본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다. 경제 성장으로 화물 수요가 늘어난 데다 1960년대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여객 수요가 폭증하면서 JAL의 사업이 연일 번창한 것이다. JAL은 1984년 팬암, 에어프랑스 등 유수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세계 1위 항공사(국제선 정기 운송 실적 기준)에 올랐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들어 JAL에 위기가 찾아온다. 부동산 거품 붕괴 등으로 일본 경제 침체가 현실화되자 항공 수요가 급감했고, 유가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 등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발생한 것이다. 사업 환경이 악화되자 방만 경영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7년 민영화 이후에도 강했던 관료들의 입김은 JAL을 괴롭히는 요인이었다. 부사장직은 정치권에서 내려온 낙하산 인사의 몫이었다. 적자를 기록하는 전국 각지의 노선들 역시 포퓰리즘 정치에 휘둘려 정리할 수 없었다. 강성노조에 따른 인건비 상승도 문제였다. 8개에 달하는 직종별 노조는 강성 투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정년퇴직한 스튜어디스에게 최대 월 48만엔의 연금이 지급됐다. 1990년대 이후 세 차례의 정부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임직원들은 위기의식이 없었고 개별 부서들은 회사의 이익보다는 부서의 이익을 추구하기 바빴다.
결국 JAL은 2010년 1월 2조3221억엔의 부채를 안고 법원에 파산보호(한국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언론들은 정부를 통해 연명하면서 방만 경영을 일삼던 대표적인 퇴물기업이 쓰러졌다고 평가했다. 위기의 JAL을 구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영입됐지만 여론은 여전히 JAL의 회생에 부정적이었다.
아메바 경영으로 위기 탈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취임 첫날 “경영의 목적은 모든 직원의 행복 추구”라고 발표했다. 심각한 노사 갈등이 있었지만 노사 간 신뢰를 회복하려면 직원의 행복 추구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노조 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설득해 나갔다. 2010년 한 해에만 4만8000명 직원 가운데 1만6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남은 직원들의 퇴직연금도 대폭 삭감됐다.
구조조정은 인력에 머물지 않았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JAL의 회생을 위해선 채산성 개념을 조직에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JAL의 직원 사이에선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성과는 수입으로 평가됐으며 수익 개념에 대한 평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을 줄일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세라를 세계적 전자업체로 만든 아메바 경영(부문별 채산제도)이 JAL에 이식됐다. 아메바 경영은 회사 전체를 10명 안팎의 소집단인 아메바로 쪼개어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에 따라 각 아메바의 매출과 비용을 월별로 확인해 성과 평가가 가능해졌다.
더불어 이전까지 정치인 눈치 보느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유지하던 적자 노선을 대폭 없애기 위해 노선총괄본부가 신설됐다. 이들은 2009년 67개에 이르던 국내 노선 중 수익이 안 나는 20개 노선을 1년 만에 없앴다. 국제선까지 포함해서 247개에 이르던 노선이 2012년 초 173개로 30%가 줄었다. 항공기는 대형, 중형, 소형에 각각 한두 기종으로 가짓수를 줄여 규모의 경제를 키웠다. 이를 통해 구매는 물론 부품·정비 비용까지 낮출 수 있었다. 보유 비행기의 평균 운행 비용은 20% 줄어들었다.
개혁의 결과는 놀라웠다. 파산보호 신청 첫해 JAL은 1884억엔의 흑자를 기록한 뒤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2012년 10월 JAL은 경영 실적 개선을 인정받아 2년8개월 만에 도쿄 증권거래소에 재상장된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체질개선에 성공한 것이다.
국민에 보은하는 경영 철학
JAL은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이 발생했다. 실종·사망자가 1만9000여명에 달하고 항만과 도로 등 교통시설이 완파된 대참사였다. 2011년 3월부터 7월까지 JAL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임시항공편 2723대가 도호쿠 지역으로 파견됐다. 오니시 마사루 JAL 회장은 “국민들의 혈세로 회사가 살아난 만큼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도호쿠 지역으로 집중했다”고 말했다.
최근 진행되는 저가 항공사의 약진은 JAL이 넘어야 할 새로운 위험 요인이다. JAL은 저가 항공이 쫓아올 수 없는 고객 중심 서비스로 저가 항공사의 추격을 뿌리친다는 전략이다. 오니시 회장은 “비용 효율화를 통해 단거리 노선의 가격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가격 차이를 뛰어넘는 서비스 제공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가격만큼 고객 중심적 서비스는 항공산업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방만 경영에 날개 꺾인 JAL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금지됐던 항공사 운영이 1950년 허용되자 항공사 설립을 서두른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선 기간산업인 항공산업 발달이 필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51년 8월 일본 최초의 항공사인 JAL이 공기업으로 설립된다. JAL은 1960~1980년대 일본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한다. 경제 성장으로 화물 수요가 늘어난 데다 1960년대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여객 수요가 폭증하면서 JAL의 사업이 연일 번창한 것이다. JAL은 1984년 팬암, 에어프랑스 등 유수의 경쟁자들을 제치고 세계 1위 항공사(국제선 정기 운송 실적 기준)에 올랐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들어 JAL에 위기가 찾아온다. 부동산 거품 붕괴 등으로 일본 경제 침체가 현실화되자 항공 수요가 급감했고, 유가 상승에 따른 비용 증가 등 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발생한 것이다. 사업 환경이 악화되자 방만 경영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7년 민영화 이후에도 강했던 관료들의 입김은 JAL을 괴롭히는 요인이었다. 부사장직은 정치권에서 내려온 낙하산 인사의 몫이었다. 적자를 기록하는 전국 각지의 노선들 역시 포퓰리즘 정치에 휘둘려 정리할 수 없었다. 강성노조에 따른 인건비 상승도 문제였다. 8개에 달하는 직종별 노조는 강성 투쟁을 계속했고, 그 결과 정년퇴직한 스튜어디스에게 최대 월 48만엔의 연금이 지급됐다. 1990년대 이후 세 차례의 정부 구제금융을 받았음에도 임직원들은 위기의식이 없었고 개별 부서들은 회사의 이익보다는 부서의 이익을 추구하기 바빴다.
결국 JAL은 2010년 1월 2조3221억엔의 부채를 안고 법원에 파산보호(한국의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언론들은 정부를 통해 연명하면서 방만 경영을 일삼던 대표적인 퇴물기업이 쓰러졌다고 평가했다. 위기의 JAL을 구하기 위한 구원투수로 일본에서 ‘경영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이 영입됐지만 여론은 여전히 JAL의 회생에 부정적이었다.
아메바 경영으로 위기 탈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취임 첫날 “경영의 목적은 모든 직원의 행복 추구”라고 발표했다. 심각한 노사 갈등이 있었지만 노사 간 신뢰를 회복하려면 직원의 행복 추구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노조 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설득해 나갔다. 2010년 한 해에만 4만8000명 직원 가운데 1만6000명이 회사를 떠났다. 남은 직원들의 퇴직연금도 대폭 삭감됐다.
구조조정은 인력에 머물지 않았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JAL의 회생을 위해선 채산성 개념을 조직에 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JAL의 직원 사이에선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성과는 수입으로 평가됐으며 수익 개념에 대한 평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용을 줄일 유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교세라를 세계적 전자업체로 만든 아메바 경영(부문별 채산제도)이 JAL에 이식됐다. 아메바 경영은 회사 전체를 10명 안팎의 소집단인 아메바로 쪼개어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에 따라 각 아메바의 매출과 비용을 월별로 확인해 성과 평가가 가능해졌다.
더불어 이전까지 정치인 눈치 보느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유지하던 적자 노선을 대폭 없애기 위해 노선총괄본부가 신설됐다. 이들은 2009년 67개에 이르던 국내 노선 중 수익이 안 나는 20개 노선을 1년 만에 없앴다. 국제선까지 포함해서 247개에 이르던 노선이 2012년 초 173개로 30%가 줄었다. 항공기는 대형, 중형, 소형에 각각 한두 기종으로 가짓수를 줄여 규모의 경제를 키웠다. 이를 통해 구매는 물론 부품·정비 비용까지 낮출 수 있었다. 보유 비행기의 평균 운행 비용은 20% 줄어들었다.
개혁의 결과는 놀라웠다. 파산보호 신청 첫해 JAL은 1884억엔의 흑자를 기록한 뒤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2012년 10월 JAL은 경영 실적 개선을 인정받아 2년8개월 만에 도쿄 증권거래소에 재상장된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으로 체질개선에 성공한 것이다.
국민에 보은하는 경영 철학
JAL은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이 발생했다. 실종·사망자가 1만9000여명에 달하고 항만과 도로 등 교통시설이 완파된 대참사였다. 2011년 3월부터 7월까지 JAL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임시항공편 2723대가 도호쿠 지역으로 파견됐다. 오니시 마사루 JAL 회장은 “국민들의 혈세로 회사가 살아난 만큼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도호쿠 지역으로 집중했다”고 말했다.
최근 진행되는 저가 항공사의 약진은 JAL이 넘어야 할 새로운 위험 요인이다. JAL은 저가 항공이 쫓아올 수 없는 고객 중심 서비스로 저가 항공사의 추격을 뿌리친다는 전략이다. 오니시 회장은 “비용 효율화를 통해 단거리 노선의 가격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가격 차이를 뛰어넘는 서비스 제공으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가격만큼 고객 중심적 서비스는 항공산업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