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권 없다는 상대와 협상…속아줄까, 판을 깨버릴까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 정 사장. 한 손님이 찾아와 최신식 내비게이션 가격을 묻는다. 고객이 요구한 제품은 매립식이라 설치에 손이 많이 간다. 설치해주는 데 30만원이라고 말하자, 손님은 바로 설치해 달라고 한다. 작업을 시작하는 동안 손님은 누군가와 열심히 문자를 주고받는다. 작업이 끝날 때쯤 손님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한다. “죄송한데요, 마누라가…” 하면서 부인과 주고받은 문자를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15만원이면 된다, 사지 말고 그냥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정 사장은 난감했다. 팔지 않으려면 설치한 것을 다시 떼어내야 하고, 그냥 팔자니 손해가 나는 상황이다.

독자 여러분이 정 사장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객에게 화를 내야 할까. 안 된다고 내비게이션을 다시 떼어내겠는가. 어차피 결정권이 없는 사람한테 화를 낸들 뭐하겠는가. 어차피 설치한 것 수고비라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아마도 원가 17만원에 설치비 3만원 정도를 더한 20만원 정도의 가격을 받고 파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협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 중의 하나가 바로 권한이 없는 협상가다. 권한이 없는 협상가는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융통성 없이 주어진 조건대로만 협상을 하려 한다. 어떤 양보도 얻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위의 예처럼 협상에서 자신은 결정권이 없어 양보를 못 하니 상대방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수법을 ‘권한위임 전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자신은 양보하고 싶지만 권한을 가진 상사가 인정을 안 한다는데 어쩌겠는가.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문제는 권한위임이 속임수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 자신이 결정권이 있으면서도 상대방에게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결정권이 없는 척할 수 있다. 결국 권한위임 전술을 사용하는 목적은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함이다. 권한위임 전술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상대방의 양보를 이끌어낸다. 먼저 중요한 시점에 상사와 상의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상대방의 조바심을 자극한다. 빨리 결정하기를 바라는 상대방이라면 조금 양보하자는 마음을 갖기 쉽다. 다음으로는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도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한다.

권한위임 전술은 다양한 협상에서 나타난다. 원자재를 구매하는 구매담당자는 상사에게 결재를 받으려면 지금 가격으로는 어려우니 조금 더 낮춰달라고 요구한다. 또 자동차 판매장에서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는 손님에게 판매원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사무실에서 나온 판매원은 손님에게 지점장이 더 이상의 할인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 전하는 식이다.

권한위임은 언제 쓰면 좋을까. 이번에만 거래하고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상대방이라면 써보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 거래할 가능성이 있다면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 손해가 된다. 상대방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음에 다시 거래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때로는 상대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권한위임 전술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이용당하지 않을 방법을 알아둬야 한다. 상대방이 권한위임전술을 사용한다면 두 단계로 대응해야 한다. 먼저 결정권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상대방에게 물어라. 그리고 결정권이 있는 사람과 협상하겠다고 요구하라.

상대방이 결정권자를 가르쳐주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모호한 이사회나 위원회 등을 대며 특정인을 가르쳐주지 않고 결정권자를 불러오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답변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상대방에게 양보를 하든지 맞받아쳐야 한다. 맞받아치려면 같이 권한위임 전술로 대응하면 된다. 나도 결정권이 없으니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양측이 모두 결정권이 없다고 하면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고 심한 경우 결렬될 수도 있다.

즉 상대에게 적당히 속아줄지, 협상이 깨지더라도 절대 속지 않을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계평 <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