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는 싱글몰트 위스키의 성지다. 스페이강변의 넓게 펼쳐진 보리밭 사이로 1824년 스코틀랜드 최초의 합법적 증류소를 만든 ‘글렌리벳’의 증류소가 자리잡고 있다. /페르노리카 제공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는 싱글몰트 위스키의 성지다. 스페이강변의 넓게 펼쳐진 보리밭 사이로 1824년 스코틀랜드 최초의 합법적 증류소를 만든 ‘글렌리벳’의 증류소가 자리잡고 있다. /페르노리카 제공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나 심플하고, 너무나 친밀하고, 너무나도 정확하다. (중략) 나는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중에서 ‘싱글 몰트 위스키’는 대자연이 빚어낸 술이다. 물, 보리, 바람과 세월 외에는 아무 것도 섞이지 않는다. 70도의 증류주 ‘스피릿’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50년까지 오크통 속에서 깊은 잠을 청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싱글몰트의 맛은 참 단순하고, 또 정직하다.

싱글몰트 위스키 마니아들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으로 가장 먼저 스코틀랜드 스페이사이드를 꼽는다. 싱글몰트의 고향이자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의 절반이 모여 있는 곳. 보리 수확을 막 마친 ‘위스키의 성지(聖地)’ 스페이사이드를 찾았다. 인천공항을 떠난 지 약 19시간. 하늘과 맞닿은 야트막한 산 사이로 쉼 없이 흐르는 스페이 강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에서 나는 구수하고 알싸한 누룩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스코틀랜드인의 자존심 ‘싱글몰트’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스코틀랜드는 보물섬과 같은 곳이다. 남에서 북으로 길게 펼쳐진 위스키 마을에 100여개가 넘는 증류소가 각각 다른 개성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위스키 생산지인 스코틀랜드는 로우랜드, 하이랜드, 스페이사이드, 아일라 등 4곳으로 구분된다. 이 중 스페이사이드의 간판인 싱글몰트 위스키는 특유의 신선하고 부드러운 과일 향을 머금고 있다. 깨끗한 1급수가 사계절 흐르는 땅 위에는 넓은 보리밭과 피트(이끼류의 식물 퇴적물)가 펼쳐져 있다.

스카치 위스키는 원료에 따라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 블렌디드 위스키로 나뉜다. 몰트는 100% 보리(맥아) 원료로 만든 위스키로, 다른 증류소의 원액을 전혀 섞지 않고 한 증류소에서 생산된 원액으로만 숙성시킨 위스키다. 흔히 ‘싱글몰트’라고 부른다. 그레인 위스키는 옥수수, 호밀 등 다양한 곡물을 증류한 것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지만 맛과 향은 몰트위스키에 크게 못 미쳐 블렌디드 위스키의 재료로 쓰인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대량생산된 그레인 위스키에 소량의 싱글몰트를 혼합한 것으로 흔히 발렌타인,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이 이에 속한다.

싱글몰트의 효시 ‘글렌 리벳’

싱글몰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자존심과 같다. 위스키는 고대 게일어로 ‘생명의 물’이라는 뜻의 ‘우스케 바(Uisge Beatha)’에서 유래했다. 포도를 재배하기 어려웠던 스코틀랜드에서 포도 대신 보리를 증류해 만든 게 우스케 바였다. 19세기에 금주령이 내려지면서 정부 관계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 스페이사이드에 밀주업자들이 대거 들어섰다. 글렌리벳, 글렌피딕, 맥캘란 등의 명주들이 지금까지 이곳에 터를 잡고 있는 이유다.

싱글몰트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글렌리벳’이 나온다. 1800년대 초 스코틀랜드에는 금주령으로 인한 불법 증류가 성행했다. 증류업자였던 조지 스미스는 1824년 글렌리벳에서 최초의 합법적인 증류 면허를 취득했다. 금주령을 내렸던 조지 4세가 오히려 글렌리벳의 위스키 맛에 빠져버린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현재 전 세계 스카치 위스키 브랜드 중 유일하게 글렌리벳에만 정관사 ‘the’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이 위스키가 싱글몰트의 효시가 됐기 때문이다.

불법 증류가 성행했던 역사를 떠올리며 글렌리벳 밀주업자가 돼봤다. 글렌리벳은 현재 ‘밀주업자의 길’이라는 뜻의 ‘스머글러스 트레일(smuggler’s trail)’ 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밀주업자들이 술을 유통시키던 비밀 통로를 따라 언덕을 올랐다. 언덕 전체에 펼쳐진 피트가 푹신푹신해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다. 얼마나 올랐을까, 숨 막힐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밀주업자들이 몸을 피하던 움막, 조지 스미스의 생가, 글렌리벳의 수원지인 조시 우물, 최초의 증류소 터 등을 돌아보며 중간 중간 싱글몰트를 시음했다. 왜 그들이 이토록 목숨을 걸고 오크통을 숨기려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오크통 따라 맛과 향 천지 차이

위스키 숙성용 오크통을 제작하는 장인.
위스키 숙성용 오크통을 제작하는 장인.
스페이사이드 지역에는 글렌리벳 증류소 말고도 47개의 증류소가 더 있다. 글렌모레이, 글렌그랜트, 맥캘란, 글렌피딕, 발베니 등 미리 예약을 하고 떠나는 게 좋다. 각 증류소마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과정, 보리를 쪄내고 구리 증류기에서 원액을 추출하는 과정까지 둘러볼 수 있다.

싱글몰트의 독특한 맛과 향은 숙성 과정이 좌우한다. 어떤 캐스크(오크통)를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 맛은 완전히 달라진다. 주로 스페인산 셰리와인을 숙성시킨 통이나 미국산 버번을 숙성시킨 통을 사용한다. 몰트를 증류한 원액은 최소 3년간 오크통에 숙성시켜야 위스키라 불릴 수 있다. 대부분의 싱글몰트는 최소 10년 이상 숙성을 거친다. 최초 알코올인 ‘스피릿’의 도수가 70도였던 원액은 위스키가 자연 증발하면서 해마다 1도씩 도수가 낮아진다. 이때 연 1.5~2%의 위스키가 증발되는데, 이렇게 날아간 술을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고 부른다.

위스키 투어에서 증류 과정을 보고 나면 동굴처럼 이어진 저장고로 향한다. 투어의 백미는 ‘테이스팅’ 순서. 위스키의 숙성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색, 향, 맛을 간직한 위스키를 캐스크에서 살며시 꺼내 음미한다. 아, 이 정도면 천사가 탐낼 만하다.

물·보리·바람, 그리고 세월이 빚은 싱글몰트 위스키의 聖地
여행 팁

○Speyside Cooperage 영국 유일의 캐스크 제작 및 수리소에 들어선 박물관이다. 15명의 캐스크 제작 장인들이 일하는 작업장도 볼 수 있다. (speysidecooperage.co.uk)

○Scotch Whisky Experience 에든버러 성 앞에 있는 위스키 박물관이다. 투어와 시음, 위스키 구매가 가능하다.( scotchwhiskyexperience.co.uk)

○위스키 시음여행(scotlandwhisky.com), 몰트위스키트레일 투어(maltwhiskytrail.com), 스코틀랜드 관광 정보(visitscotland.com)를 얻을 수 있는 홈페이지 참조.

스페이사이드(스코틀랜드)=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