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
경기 성남시 분당구 분당서울대병원 2층에 있는 40㎡ 규모의 국제진료센터 진료실. 김 세르게이 교수(44·국제진료과)가 외국인 환자들을 맞는 진료실이다.

지난 22일 이곳에서 만난 김 교수의 인상은 ‘한국의 평범한 청년’이었다. 40대 중반이지만 훨씬 젊어 보였다. 한국어도 유창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들릴 정도로 그의 말은 친근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4세’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니 죽음 계기로 의대 입학
신일희 계명대 총장 통역 맡은 인연…한국서 석·박사 공부할 기회 얻어

연구원 생활 10년 하다 병원 복귀
러시아어·카자흐스탄어·영어 능통…분당서울대병원서 외국인 환자 전담

2010년 한국 국적 취득
고려인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의 자산…배려할 수 있는 의료프로그램 필요


분당서울대병원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지난해 5000여명이었다. 낯선 땅에 병을 고치러 온 외국인들에게 김 교수는 ‘환자 제일주의(第一主義)’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겠다는 마음으로 일합니다. 항상 웃으려고 노력하지요. 고국(한국)에서 의사로 환자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

분당서울대병원에 외국인 환자 전용 국제진료센터가 세워진 것은 김 교수가 이 병원에 온 지 3년쯤 지나서였다. 그가 병원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돌풍을 일으킨 결과다. 중앙아시아 외국인 환자가 늘어난 것은 물론 외국인 의사들의 연수도 줄을 잇고 있다.

“나의 핏줄은 한국”

[人사이드 人터뷰] 김 세르게이 "제가 분당서울대병원 온 뒤 외국인 환자 20배 늘었죠"
김 교수에게 한국에 오게 된 사연을 묻자 어린 시절 어머니 말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우즈베키스탄 역사책을 많이 읽었는데, 한번은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너의 핏줄은 한국사람’이라고 말해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한국사람이구나’ 하고 깨달았죠.”

이후 김 교수는 집안의 가계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가족사는 1870년대 프리모르스키(옛 연해·沿海)주로 이주해온 조선인 증조할아버지가 출발점이다. 그 뒤 할머니, 아버지, 자신에게로 고려인의 피가 이어졌다는 것.

김 교수에게 ‘조선 말에 연해주로 갔는데 왜 고려인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처음에는 조선인라고 했는데, 남북 분단이 되고 북한만 조선이라고 쓰면서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모친이 뇌졸중으로 별세했을 때 장례식을 한국의 전통 방식으로 치렀다고 설명했다. 집 안방에 병풍을 치고 입관을 했다. 지붕에 올라가 옷을 흔들면서 고인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의식도 했다. 어머니의 별세를 계기로 김 교수는 의사의 길을 선택했고, 한국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신일희 계명대 총장과의 만남

김 교수는 러시아 명문 의대로 꼽히는 제1 레닌그라드 의과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의대)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카자흐스탄에서 레닌그라드 의대에 들어간 사람은 김 교수가 유일했다. 의대를 졸업한 뒤 1996년 인턴생활을 하던 그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신일희 대구 계명대 총장이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됐는데, 현지 교회 목사의 추천으로 김 교수가 통역을 맡았다. 당시 김 교수는 신 총장의 통역 겸 비서 역할까지 했다. 신 총장은 김 교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 발음과 레닌그라드 의대의 유일한 고려인이라는 점을 높이 샀다.

행사가 끝난 뒤 신 총장은 “자네 한국에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는가. 괜찮으면 우리 대학에 와서 공부해 보면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김 교수는 ‘인사치레’로 생각했는데, 이듬해 계명대에서 입학 서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다. 김 교수는 고민 끝에 의대 대학원 석·박사과정 입학서류를 보냈다. “그 이후 몇 개월간 소식이 없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6개월이 지난 8월쯤에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신 선생님을 통해 한국이 나를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의 병원에 연수를 온 최초의 고려인 수련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연구원으로 외도 10년

김 교수는 순환기내과 분야 박사학위(대구 계명대)를 받았지만 의사 면허 시험은 통과하지 못했다. 김 교수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던 해 의사국가시험이 모두 한국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영어 위주로 준비한 김 교수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진료 현장에 나갈 수 없게 된 그는 2002년 한·러 합작회사인 메이미르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각종 의료기기 개발에 관한 임상과 조언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2005년 한국전기연구원(KERI)이 러시아 국립광학연구소와 합작으로 경기 안산에 연구센터(쏘이코리아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면서 그곳으로 이직했다. 선임연구원으로 초기 암 진단기 개발팀을 총괄했다. 4년간 형광 물질을 통해 초기 암을 진단하는 기술 개발에 집중했고, 김 교수의 주도로 피부질환 진단기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운명은 김 교수를 병원으로 다시 이끌었다. 각종 의료기기 정보를 얻기 위해 참석한 대학광역학학회에서 또 다른 인연이 맺어졌다. 2011년 당시 학회 이사였던 전상훈 분당서울대병원 기획조정실장(흉부외과 교수)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8월 카자흐스탄 보건부 차관이 분당서울대병원을 방문했을 때 전 실장은 김 교수에게 통역을 부탁했고, 행사를 마친 뒤 분당서울대병원은 새로 만드는 외국인 진료센터의 외국인 환자 진료 전담 교수로 김 교수를 데려오기로 했다. 김 교수의 의사 경험과 의학박사 학위, 한국어·러시아어·카자흐스탄어·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언어 능력을 높이 샀다.

전 실장은 “김 교수는 외국인 환자들과 상담하며 진료과를 정해주고, 일일이 치료 과정을 챙겨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국제진료센터 실무를 맡은 뒤 러시아, 독립국가연합(CIS) 등에서 오는 환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전 실장은 김 교수에게 상담받은 뒤 자신의 진료과로 넘어오는 외국인 환자 수가 무려 20배나 늘었다고 소개했다.

“이젠 한국이 내 집 같다”

김 교수는 2010년 귀화 시험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김 교수는 “이젠 한국이 내 집 같다”고 말했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인지 이곳에서 좋은 사람을 만났고, 험한 차별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솔직히 해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한국이 편하고 좋습니다. 나이가 들면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습니다.”

올해 초부터 러시아 모스크바시 보건국 소속 의사 250여명이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의료 연수를 받고 있다. 김 교수는 이들을 각 진료과에 배치하고 선진 의료기술을 체험하도록 돕는 도우미 역할도 맡고 있다. 고려인이자 재외동포 출신으로 한국의 동포 정책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고 부탁하자 ‘포용’이라는 단어가 돌아왔다. “러시아에 있을 때 재외동포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독일과 이스라엘을 부러워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이 고려인들을 한국은 왜 포용하지 못할까요. 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한국의 자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을 찾을 때 배려할 수 있는 의료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합니다.”

■ 김 세르게이 교수

▷1971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출생
▷1988년 카자흐스탄 공립고등학교(233슈콜라) 졸업
▷1994년 제1 레닌그라드 국립의대 졸업
▷2001년 대구 계명대 의대 석·박사과정 졸업
▷2002년 한·러 합작회사 메이미르 임상연구원
▷2005년 한국전기연구원(KERI) 선임연구원
▷2010년 한국 국적 취득
▷2012년~ 분당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교수

이준혁 기자 rainbo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