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표 부탁드립니다” > ITU 전권회의 참가자들이 23일 부산 벡스코 회의장에서 주요 임원 선거에 대비해 회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부산=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 “한 표 부탁드립니다” > ITU 전권회의 참가자들이 23일 부산 벡스코 회의장에서 주요 임원 선거에 대비해 회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부산=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유엔이 주식회사라면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은 협동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ITU전권회의] ITU 고위직 선거전 치열…나라 특산물 돌리고 컨설팅도 받아
20일부터 ITU 전권회의가 열리고 있는 부산 벡스코. 회의에 참가한 170여개국 3000명의 세계 각국 정부 대표단은 인터넷주소 자원관리, 주파수 배분 등 주요 의제를 정하고 ITU 고위직을 뽑기 위한 선거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ITU 내 외교전이 어떤 국제기구보다 치열하다고 말한다. 분담금을 많이 낸 이사국들이 주요 의제를 주도하는 유엔과 달리 ITU에서는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들도 강대국과 똑같이 한 표를 갖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서다.

○특산물 커피로 홍보하는 르완다

“르완다 커피 맛보세요.” 커피를 홍보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전권회의가 열리는 부산 벡스코 내 풍경 중 하나다. 아프리카 지역 ITU 이사국 진출을 노리는 르완다는 선거 홍보 행사에 참석한 다른 나라 대표들에게 커피를 선물로 나눠주고 있다.

통상 선거 홍보는 점심, 저녁 연회를 열고 식사를 대접하며 진행된다. 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회의 기간 연이어 연회를 갖는 데만 적게는 3000만원에서 많으면 수억원씩 들어간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르완다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특산품인 커피 선물이다.

이번 부산 전권회의 기간에는 사무총장, 사무차장, 전파·표준화·개발총국장 등 5대 고위직과 이사국 선거 등이 치러진다. 사무차장에는 모리타니와 나이지리아, 개발총국장에는 브르키나파소, 표준화총국장에는 튀니지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후보를 냈다.

효과적인 득표활동을 위해 로펌 등에서 컨설팅을 받는 나라도 많다. 외교 판세를 분석해 어떤 나라를 공략하고 어떤 거래를 주고받을지 조언을 받는다. 컨설팅 비용 상당수는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대신 부담하기도 한다. 아프리카 후보를 도와주는 대신 자국 후보가 나온 다른 선거에서 표를 약속받는다.

ITU 표준화총국장 선거에 나선 이재섭 KAIST 연구위원.
ITU 표준화총국장 선거에 나선 이재섭 KAIST 연구위원.
이재섭 KAIST 연구위원이 한국인 최초 ITU 고위직 진출을 노리는 표준화총국장 선거에도 아프리카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 이 연구위원과 경합이 점쳐지는 후보는 튀니지 출신이다. 23일 치러지는 사무차장 선거 결과가 다음날 열리는 표준화총국장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무차장 후보로 나온 모리타니 등 아프리카 후보가 당선되면 표준화총국장 투표에서 같은 아프리카권인 튀니지의 표가 줄어들 수 있어서다.

법무법인 ‘원’ 소속 김윤재 변호사는 “유엔은 이사국들의 분담금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지는 반면 ITU는 모두가 같은 한 표를 가지고 있다”며 “각종 선거와 의제 설정 등에서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외교전이 어떤 국제기구보다 치열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의제 채택 경쟁도 치열

의제 채택에서도 국가별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은 이번 회의에서 ITU 사무차장의 권한을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ITU 내 ‘빅2’인 사무총장과 사무차장 간 모호한 역할 구분을 재정립하자는 취지지만 사무총장이 유력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포석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사무총장에는 중국의 자오허우린이 단독 출마해 당선이 유력하다. 사무차장의 권한 강화를 통해 중국계 사무총장을 견제하려는 포석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쿠바는 인터넷 사용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제를 발제했다. 정보기술(IT) 분야의 보편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신장비 수출을 제한한 미국을 겨냥한 의미도 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환경 문제와는 달리 정보보안 안건에서는 개도국들이 ITU의 규제 권한 강화를 요구하는 반면 선진국들은 소극적인 입장”이라며 “국가별로 정부 내 ICT 부처뿐만 아니라 외교부 등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한 외교전이 펼쳐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산=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