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재현장면=해남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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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 6년째 1597년 음력 9월 16일, 세계 해전사에서 앞이고 뒤고 간에 없을 대첩의 역사 ‘울돌목, 鳴梁’ [鳴울 명梁 들보 양]이 영화로 만들어져 무려 17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신기록을 작성했습니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돼 (칠천량해전의 대패에서 그나마 남은) ‘상유십이척’ [신에게 아직은 12척의 배가 남았사옵니다]으로 30배 넘는 왜선을 물리친 대승리의 기록입니다.

임원빈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이 쓴 ‘이순신 승리의 리더십’에 따르면 당시 이처럼 함선 수에서 열위에 있던 이순신은 탐망선을 이용해 적의 동태를 치밀하게 감시하며 계속 도망을 다니면서 싸울 장소로 명량의 좁은 물목, 즉 울돌목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신은 우세한 왜의 수군함대를 좁은 물목에 가둬 놓고 조선 수군으로 하여금 해협입구에다 포진시켰습니다. 이 곳을 빠져 나오는 선두 함선을 집중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이는 외나무다리에서 홀로 수십 명을 대적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임원빈 소장은 설명합니다. 이순신의 도망가는 전략에 말려든 왜 수군은 당초 어란포에 집결한 330척의 함선을 동원하지 못하고 명량해전에선 133척만이 조선 수군을 공격하는데 그쳤습니다.

이 133척 마저도 조류가 세고 좁은 물목에서는 31척만이 해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게 임 소장의 설명입니다. 당초 1대 30의 대결을 1대 3으로 줄여 붙어볼 만한 상황을 이순신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얘깁니다.

장군은 이날 전투에 임하며 말씀하셨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則生, 必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 같은 전무후무의 해전 역사가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울돌목 현장에서 재현됐습니다. 전남 해남군이 매년 주최하는 명량대첩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이날 재현 행사는 5~10톤급 선박 100척과 주민 5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조선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조선을 침범한 왜선을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최대한 실제 모습과 같게 꾸민 것이 특징입니다.

전투 재현에서 1만5000발의 폭약을 사용해 실전을 방불케 했다고 해남군청측은 설명합니다.

[울돌목 = 폭 294m로 매우 좁아 세계에서 5번째로 빠른 유속을 보이고 장소. 하루에도 4번씩 조류방향이 바뀌는 곳. 실제 명량해전은 아침부터 오후 4시까지 이뤄졌으나 행사는 안전을 위해 조류가 가장 약한 정조기 30분 동안 진행. 사진제공=해남군청 김성희씨]
/해남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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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뉴스국 윤진식 편집위원 js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