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세계은행 총재(55)는 아시아계 비경제 전문가로는 최초로 세계 최대 개발기구의 수장에 올랐다. 2012년 3월2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제 개발전문가가 주도할 때가 왔다”며 다트머스대 총장이던 김 총재를 차기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했다. 예상 밖의 깜짝 인사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역대 총재 11명이 모두 미국 정치나 금융계 출신인 데 비해 그는 의사이자 인류학자였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비경제 전문가’란 수식어가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후보자 면담에서 김 총재에게 “세계은행 총재 미국 후보자로 거시경제학자가 아닌 사람을 선택한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 총재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모친의 인류학 박사 학위 논문을 읽어 보았느냐”고 반문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어머니는 논문을 통해 많은 사람이 세계화에 따른 인도네시아 공예 산업의 몰락을 예견했으나, 도리어 새로운 시장에 대한 접근성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김 총재 역시 이론을 넘어 구체적인 현실을 보는 인류학자라는 점을 강조해 오바마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는 1987년 파트너스 인 헬스(PIH)라는 의료구호단체를 조직해 아이티 페루 르완다 등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 담당 국장을 맡아 3년 만에 300만명의 에이즈 환자를 치료하는 성과를 냈다. 이렇게 경제학자의 이론을 뛰어넘어 의료·교육·인프라 사업이 실제 개발도상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직접 경험한 최초의 세계은행 총재가 나온 것이다.

그가 의사 출신 인류학자가 된 것은 미국 내 소수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미국에서 동양인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뒤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그 궁극적인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성미였다. 그것이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 대신 전 세계의 빈곤과 질병을 퇴치하는 길을 걷게 된 이유다.

김 총재는 WHO 에이즈 국장 당시 에이즈 환자 치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2005년 미국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지가 뽑은 ‘미국 최고의 지도자 25인’과 이듬해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잇따라 이름을 올렸다.

그의 도전은 의사에서 개발전문가, 다시 대학 총장으로 이어졌다. ‘세상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신념에 따라 젊은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2009년 다트머스대 총장 취임식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세상의 문제가 바로 여러분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라”며 “또 열정과 끈기만 있다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당부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