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향한 절박함…뉴욕타임스의 '디지털 퍼스트'
정보기술(IT) 시대의 이정표이자 생존 도구인 혁신.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는 “지도자와 따르는 자를 구분 짓는 잣대가 혁신”이라 했다. 삼성전자는 ‘혁신적 리더’를 한계 돌파의 원동력으로 꼽는다. 혁신의 부재(不在)는 곧 종속이자 도태다.

‘정치 혁신’ ‘사회 혁신’ 등 혁신은 이제 생활 전반에 넘친다. 구글 웹사이트에서 혁신을 영어로 검색해보자. 0.34초 만에 1억1400만개의 결과가 쏟아진다. 이 가운데 번쩍이는 전구 그림이 포함된 문서가 유독 많다. 주요 연관 키워드는 개방(open), 발전(development), 지식(knowledge) 등이다. 개방적 문화에서 지식을 탐구할 때 싹트는 발전적 아이디어가 혁신이라는 뜻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혁신에 대한 정의는 판이하다. 혁신이란 피사체를 집단 스케치하는 미술학도들처럼 경영, 경제, 행정, 산업, 과학, 기술 진영은 저마다 다른 각도로 묘사한다.

또 다른 ‘혁신’이 있다. 지난 5월 미국 최대 일간 뉴욕타임스가 작성한 ‘혁신 보고서’다. 94페이지짜리 이 영문 문서는 온라인과 무선망을 타고 전 세계 동종 언론업계뿐만 아니라 혁신에 목마른 이들 눈앞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이 내부용 보고서에 많은 이들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언컨대, 충격이었다. ‘뉴욕타임스마저도…’와 같은 절망감이었다. 1851년 창간 뒤 163년의 역사를 간직한, 미국 지성인의 자랑인 신문이자 디지털 유료 독자 수가 오프라인을 앞지른 ‘그 대단한’ 뉴욕타임스마저 디지털 혁신의 벽 앞에서 수년째 실패의 쓴맛을 보고 있다는 내용이 빼곡했다.

온라인 중심의 ‘디지털 퍼스트’ 전략을 실행하는 데 맞닥뜨린 벽과 조직적 한계, 변화에 저항하거나 무관심한 구성원, 독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하지 않는 마케팅 등 뉴욕타임스가 왜 과거 방식을 탈피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했다.

그들을 위협하는 대상은 더이상 가디언, 월스트리트저널 같은 거대 언론사가 아니었다. 버즈피드, 복스 등과 같은 디지털 기술력 기반의 신생 미디어나 구글과 페이스북, 넷플릭스 같은 IT기업이라고 실토했다.

더 실망스러운 건 이 보고서에는 요술방망이 같은 혁신 방안도 없다. “분명히 밝히지만 ‘이 아이디어만 채택하면 완전한 변신을 이룰 수 있다’는 식의 만병통치 약을 담고 있지 않다”고 서론에서부터 선을 긋는다. ‘변신’이라는 단어조차 쓰기 꺼렸다. ‘혁신이 안 되면 변신이라도 가능하겠지’ 같은 기대도 부담스럽다는 뜻이다.

게다가 뉴욕타임스는 비장했다.

“종료는커녕 웹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중략) 혼돈 속에서 일하는 시대. 미래에도 현재 지위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진화해야 한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다만 아서 설즈버거 주니어 뉴욕타임스 회장의 아들인 그레그 설즈버거를 중심으로 한 뉴욕타임스 혁신팀원 10명이 6개월간 외부 126명, 내부 인력 28명 등 모두 354명을 심층 인터뷰한 이 보고서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디지털 우선 전략을 촉구하는 ‘디지털 퍼스트’다.

뉴욕타임스는 전통적 관점에서 언론이라 칭할 수 있는지도 의문인 신생 미디어에 점점 독자를 빼앗기고 있다. 기술력과 콘텐츠로 무장한 IT 기업의 전방위 공세 속에서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디지털은 뉴욕타임스의 전통 권위를 무너뜨리는 위협이다. 타이타닉호를 수장시킨 거대한 빙산처럼 디지털이 뉴욕타임스를 침몰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속수무책으로 빙산과 충돌할지, 육중한 방향타를 디지털로 돌릴지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었다. 뉴욕타임스의 혁신 보고서는 그래서 도전이자 희망이며, 먼 훗날 혁신으로 평가받을 거라 믿는 자신감이다.

이 가치에 주목한 국내의 한 디지털미디어 연구 포럼이 최근 혁신 보고서 한글 번역판을 공개했다. 국내 19명의 미디어 관련 전문가들이 재능 기부 형태로 엮은 비상업용 온라인 문서다.

번역을 주도한 박상현 리틀베이클라우드 공동설립자에게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지 물었다. 박 설립자는 “혁신은 결국 없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의 절박함은 1등을 고수하던 신문사가 난생 처음 1등을 추격하는 IT기업으로 전락한 충격에서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혁신을 향한 절박함…뉴욕타임스의 '디지털 퍼스트'
그는 “뉴욕타임스는 성공여부가 불투명한 ‘지도에 없는 땅’으로 가고 있다”며 “혁신 보고서는 전무후무한 시도이자 도전”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마저 침몰시킬 수 있는 거대한 빙산은 이미 우리에게도 접근하고 있다. “혁명은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이 아닌 행동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던 미디어 전문가 클레이 셔키(뉴욕대 교수)의 말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김민성 기자 me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