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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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직장인 이모씨(29)는 얼마 전 남자친구와 철없는 호기심에 찍었던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돼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는 “동영상 뒤에는 사진까지 붙어 있어 지인들은 대부분 알 수 있을 정도”라며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2.대학생 문모씨(24)는 주로 쓰는 인터넷 아이디가 5개나 된다. 친구들과 공유하는 이메일 주소 아이디, 인터넷 뱅킹을 할 때 쓰는 아이디, 포털용 아이디 등을 각각 따로 갖고 있다. 특별한 아이디도 있다. 인터넷 게시물에 댓글을 달 때 쓰는 아이디다. 그는 “언제 어떤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고, 제대로 관리하기도 힘들다”며 “내가 쓴 댓글이 인터넷에 떠도는 게 싫어서 아예 별도 아이디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나 문씨 같은 사례가 늘어나면서 최근 국내에서는 이른바 ‘디지털 세탁소’라는 신종업종까지 등장했다. 개인을 대신해 인터넷상 게시글이나 동영상 사진 등을 삭제해 주는 전문업체들이다. 남기고 싶지 않은 인터넷 콘텐츠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국내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국내서도 잊혀질 권리 입법 움직임

[붐비는 디지털 세탁소] "온라인에 퍼진 前 남친과 동영상, 죽을만큼 괴롭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란은 지난 5월 유럽사법재판소(ECJ)의 판결이 나오면서 촉발됐다. 당시 재판부는 스페인의 한 변호사가 구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며 “검색 결과를 지우라”고 판결했다. 앞서 이 변호사는 “과거에 빚 때문에 집이 경매에 부쳐진 내용이 담긴 기사를 검색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이 판결은 검색 결과에 대한 ‘링크(연결)’ 삭제권도 잊혀질 권리에 포함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윤종수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중요한 것은 포털(구글)을 개인정보 처리자로 인정했다는 부분”이라며 “앞으로 개인이 포털에 정보 삭제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판결 이후 유럽에서는 2개월 간 8만건 이상의 포털 게시글 삭제 요청이 쇄도했다. 국내에서도 방송통신위원회를 중심으로 관련 논의가 이뤄지며 법제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2012년 대학생 19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81%가 ‘잊혀질 권리’ 입법에 찬성하기도 했다.

잊혀질 권리 vs 알 권리

하지만 잊혀질 권리가 지나치게 인정될 경우 공공의 ‘알 권리’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3월 서울의 한 병원은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에서 병원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의료사고’가 뜬다”며 “이를 없애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포털 측은 이를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에 심의를 맡겼다. 결국 KISO는 “해당 검색어는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관에서 불의의 사고와 관련된 것으로 공공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이를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KISO는 공공의 이익 등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운영 세칙을 마련해 두고 있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잊혀질 권리의 지나친 확대 적용은 언론의 표현 자유, 알 권리 등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디지털 유산 논의도 시각 엇갈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은 망자(亡者)에 대한 ‘디지털 유산’ 논의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망한 사람의 인터넷 계정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의 문제 등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포털들은 제각각 다른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구글은 ‘휴면계정 관리자’라는 서비스를 통해 일정 기간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콘텐츠를 다른 사람에게 미리 보내도록 설정해 둘 수 있다. 야후도 고인의 온라인상 콘텐츠를 정리해 주는 ‘야후 엔딩’이라는 서비스를 최근 선보이기도 했다.

페이스북은 사망 사실을 유가족이 알리면 그 계정을 기념 계정으로 보존하는 정책 등을 적용하고 있다. 국내 인터넷 사업자들은 유족에게 가입 정보 등은 제공하지만 관리 권한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다만 유족이 아이디 비밀번호 등을 알아 관리할 경우 묵인하는 수준이다.

디지털 유산 처리 문제를 두고 일반인의 시각도 엇갈린다. KISO가 지난해 511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공개 콘텐츠’를 가족 또는 친구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응답은 76%에 달했다. 하지만 ‘비공개 콘텐츠’를 가족에게 공개하고 싶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