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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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이란의 서남부, 걸프 지역 북쪽에서 조각난 돌기둥이 발굴됐다. 기원전 1800년께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거기에 이자에 관한 기록이 이렇게 나와 있다. ‘상인이 곡물을 빌려줄 때 곡물 1구르에 대해 100실라의 이자를 받는다. 은을 빌려 줄 때는 은 1세켈에 대해 6분의 1세켈 6그레인의 이자를 받는다.’ 1세켈은 176.24그레인이므로 이자율은 20%가 된다. 그리고 이자를 20% 이상 받는 상인은 ‘원금을 상실하는 처벌을 받는다’고 나와 있다.

사실 이자에 대한 기록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훨씬 이전에 수메르인들이 설형(쐐기)문자로 남긴 점토판에도 등장한다. 이 점토판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 사실은 이자 수취 행위는 기록된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는 것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자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시간 속에서 영위된다. 사람들은 같은 재화를 미래에 소비하기보다는 현재에 소비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둔다. 사람들은 미래재화보다는 현재재화를 더 선호하는 ‘시간선호(time preference)’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자는 바로 이 시간선호 때문에 생긴다. 다시 말하면 이자는 현재재화와 미래재화의 가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시간에 대한 가격’으로서 인간사회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자는 은행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은행업이 나오지만 오늘날과 같은 은행의 형태가 아니었다.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대부업(貸付業)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에서 상업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환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뱅크(bank)라 불리는 환전대 위에서 당시에 유통되는 품질이 제각각인 잡다한 종류의 화폐를 교환해주면서 상업적 교역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 은행이 뱅크라고 불리는 연유다.

현대적 은행의 형태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왔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채무불이행으로 1345년 파산했던 페루치가(家)는 단순한 대부업이나 환전상이 아닌 예금을 받고 대출해주는 금융중개인이었다. 페루치가는 그 유명한 메디치가가 나오기 전 14세기 바르디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금융 가문이었다. 페루치나 바르디와 같은 금융중개업 형태가 나타난 것은 오랜 기간 유럽에 존재했던 이자금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자금지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 유대인 사이에 내려오다가 기독교 사회에서 처음에는 성직자들에게만 적용됐다. 그러나 중세 말기 상업의 발전과 함께 신용거래가 보편화되면서 일반 신도들에게까지 확대됐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이자를 죄악시했음을 말해준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파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불공정하며, 더 나아가서는 정의에 반하는 불평등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이런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비우호적인 금융환경에서는 원금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위험, 즉 ‘역선택’의 위험이 많다. 위험이 크기 때문에 이자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높은 금리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원금을 되돌려 받는 것이다. 원금을 되돌려 받을 수 없는 역선택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나온 것이 담보 대출이다. 담보 대출은 오늘날까지도 금융거래의 중요한 거래방식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담보대출은 반복적이고 단기적인 금융거래에서는 많은 거래 비용을 수반한다.

반복적이고 단기적인 금융거래에서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나온 것이 신용거래였다. 상인들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서로의 사업 상태에 대한 정보와 신용도를 바탕으로 거래를 했다. 그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 어음이다.

어음은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금액을 내겠다고 약속한 증서다. 처음에는 어음 발행자가 빚진 금액을 채권자에게 주화나 재화로 직접 지급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음의 이서로 상인들 사이에 서로 이전되고 할인시장에서 유통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 예금은행업이었다. 명성이 높은 무역상이 발행한 어음은 먼 지역에서조차 신뢰성 있는 지급수단으로 사용됐다. 그러자 작은 상인들이 자신들의 자금을 그 무역상에 예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 무역상은 예치된 자금을 이용해 다른 어음을 할인해서 살 수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이자금지법을 피해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 페루치나 바르디와 같은 은행가들이다. 17세기에 이런 금융중개기관이 더욱 발전해 오늘날과 같은 은행이 됐다.

보통 역선택 문제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로 발생하는 시장실패로 알고 있다. 그래서 시장실패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담보대출, 어음, 은행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역선택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시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낸다.

담보대출, 어음, 은행 등과 같은 금융제도는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다. 시장의 자생적 질서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다. 그것도 이자 수취를 죄악시하며 금융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우호적인 환경에서 등장한 제도다.

금융혁신의 숨은 공로자 '0'

복식부기 탄생 주역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은행과 같은 금융 혁신을 일으킨 숨은 공로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숫자 ‘0’(零·제로)의 발견이다. 경제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0’의 발견이야말로 세계 경제를 바꾼 커다란 사건이었다.

바빌로니아 셈법은 오늘날과 같은 10진법이 아니라 60진법이었다. 그것도 조악한 설형문자로 표현됐다. 이 셈법은 처음에는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거래량이 증가하면서 큰 수를 표시하는 데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원전 3세기께 큰 수를 나타내기 위해 ‘0’을 썼다. 그러나 그것을 ‘빈 곳’을 나타내는 데 쓴 것이지 수학적인 양(量)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인도학자들은 6, 7세기께 ‘0’을 ‘아무것도 없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했다. 이 개념이 9세기에 유명한 수학자 알-콰리즈미에 의해 이슬람 문화에 소개되면서 혁명이 일어났다. ‘0’을 포함한 아라비아숫자가 이슬람 세계에 확산됨에 따라 기업 규모가 커지고 은행업과 신용제도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아라비아숫자는 11세기에 바다를 건너와 유럽에 더 크게 영향을 미쳤다. 중세 암흑시대가 끝나고 베니스 등 이탈리아 도시 중심으로 상업 활동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재산의 출납과 변동 등을 기록하는 데 따르는 부기(簿記)의 오류였다. 한 상인이 차변(借邊)과 대변(貸邊)에 동시에 거래의 내용을 입력하는 복식부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물건을 샀으면 그것은 대변에, 그것을 사기 위해 썼던 비용 등은 차변에 입력하는 방식이다.

복식부기는 부기오류를 찾아내는 것 이상이었다. 복식부기를 사용하면 자산과 부채를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순자산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자본을 대는 사람과 경영자가 분리되는 기업지배구조도 가능하게 됐다.

이 혁신은 새로운 금융제도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당시엔 신용할 만한 차입자를 찾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복식부기는 대부자에게 공통된 회계언어를 제공해 상인들의 성과와 신용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줬다. 이로 인해 어음, 은행 등과 같은 금융제도가 발달할 수 있었다. 조그만 수 ‘0’이 그렇게 세상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