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극계에서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 못지 않게 존경을 표하고 자주 무대화하는 극작가는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다. 지난해엔 ‘체호프 신드롬’이라고 할 만큼 그의 작품들이 많이 공연됐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존재감이 뚝 떨어졌다. 올해 ‘탄생 450주년’이란 타이틀을 단 셰익스피어의 위세에 눌려서다.

그랬던 체호프가 여름 연극 무대에 화려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그것도 ‘갈매기’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 4대 장막극이나 ‘곰’ ‘청혼’ 등 인기 단막극이 아닌 ‘플라토노프’ ‘이바노프’ ‘숲귀신’ 등 국내에선 관람할 기회가 드물었던 그의 초기작을 통해서다. 체호프를 좋아하는 연극 팬이라면 더없이 반가워할 만한 무대다.

‘플라토노프’는 국립극단이 오는 28일부터 내달 6일까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한다. 이 작품은 권태로운 일상에 빠진 플라토노프가 여성들을 자신의 희생양으로 삼는 이야기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교차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대담하고 재치 있게 그려내는 코미디다.

이번 공연엔 국립극단의 젊은 연극인 육성 프로그램인 ‘차세대연극인스튜디오’에서 16주간 수업을 받은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이병훈 연출가는 “작품의 현대적인 감성과 대담한 열정이 젊은 배우들의 에너지와 딱 맞는다”며 “배우들의 성과와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극단 ‘체’가 내달 10~20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이바노프’는 체호프 작품 중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갈매기’의 원형이 된 작품이다. 체호프는 주인공 이바노프를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아내의 사랑도 잃은 전형적인 사회 지도계층의 우울한 러시아인으로 묘사한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연극대학에서 공부한 강태식 연출가가 원본을 직접 번역해 무대에 올린다. 강 연출가는 “사회의 보수적이고 부정적인 조건이 만들어 낸 무기력증이나 피로감과 같은 일상의 ‘병’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남성진 권성덕 장보규 이주실 손종학 등 출연.

‘숲귀신’은 내달 10일부터 8월10일까지 서울 삼성동 안톤체홉극장에서 공연된다. 애플씨어터가 제작·기획하고 ‘체호프 전문가’인 전훈 연출가가 번역·연출했다. 이 작품은 체호프가 10년 후 대대적으로 개작해 ‘바냐 아저씨’로 재탄생시켰다. 그런 만큼 이야기 기본 구조와 등장 인물 성격 등은 ‘바냐 아저씨’와 비슷하지만, 이고르(바냐)의 자살 시도가 미수가 아닌 죽음으로 이어지고 엘레나의 미래도 바뀌는 등 전개와 결말이 다르다. 소냐가 못생긴 처녀가 아닌 아름다운 처녀로 나오는 점도 흥미롭다.

전 연출가는 “비극인지 멜로드라마인지 모호한 희곡의 정체성을 ‘풍자적 비극’으로 정리했다”며 “후기 낭만주의적 성향이 남아 있는 내용을 과감히 삭제해 무대에 올린다”고 밝혔다. 남명렬 최원석 류태호 등 관록의 배우들이 출연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