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바꾼 '왕중왕' 타이틀
맛·기술 인정받은 방송 출연 후 대형 유통업체 '러브콜' 쏟아져
10여개 매장 직영체제로 운영
전통 먹거리 들고 세계로
흑임자·미숫가루 등 재료 차별화…백화점 행사 하루 1000명씩 몰려
인천공항에 매장…中시장 진출도
손님들의 눈길을 끈 것은 단연 김진호 호떡이었다. 21년 경력이 뿜어내는 현란한 손기술이 손님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첫 번째 기술은 ‘1타2피’. 뒤집기 용구로 호떡 두 개를 한꺼번에 뒤집는 기술이다. 손목 스냅을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김진호만의 장기다. 두 번째는 3초에 한 개씩 떡을 성형하는 기술. 지름 10㎝의 용구로 지름 11㎝의 호떡을 똑같은 크기로 찍어내는 기술이다. 일반인은 1분에 1개를 찍어내는게 보통이다. 덕분에 행사 매장에는 하루 1000여명의 고객이 몰렸다. 정희원 신세계백화점 과장은 “가격이 1000~2000원인 전통시장 먹거리 7가지로 1주일간 1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것은 백화점 식품매장에서 전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진호 (주)경기F&B 대표의 명함 맨 윗줄에는 ‘호떡 최강달인 왕중왕’이란 칭호가 눈에 띈다. 길가 노점상에서 흔히 사 먹을 수 있는 호떡을 기업화한 계기가 바로 ‘최강달인 왕중왕’이란 칭호를 달면서부터다. 2009년 12월 모 방송사의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출연, 전국에서 뽑혀온 세 명의 호떡 달인과 경쟁, ‘왕중왕’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호텔 주방장, 요리 전문가, 외식학과 교수 등 심사위원들이 맛 50%, 기술 50%를 기준으로 네 명의 호떡 달인을 평가한 결과 김 대표가 300점 만점에 271점을 얻어 1등에 선정됐다. 그 비결은 식재료의 차별화와 물과 불의 온도를 조절하는 노하우에 있었다.
김진호 호떡의 반죽과 속에는 남들이 쓰지 않는 재료들이 몇 가지 들어간다. 우선 반죽에는 필수재료인 밀가루와 찹쌀 외에 우유, 버터, 흑임자를 넣는다. 속에는 설탕 외에 미숫가루와 견과류를 넣어 영양을 보충하고 설탕물이 흐르는 것을 방지한다. 1시간 동안 발효한 반죽을 2시간 뒤 구워 판매하는 것도 최상의 맛을 내는 비결 중 하나다. ‘흑임자 찹쌀 호떡’이란 이름은 김진호 호떡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2009년 왕중왕 타이틀을 딴 이후 외부에서 섭외가 쇄도했습니다. 대형 유통업체의 이벤트 행사에도 잇따라 초청받고요. 호떡에 모든 것을 걸었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더군요. 이듬해 1월5일 아버님이 작고하시면서 두 가지 말씀을 남기셨어요. ‘호떡장사 하지 말라고 그렇게 반대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네가 가장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다’고 하시면서 ‘남은 형제들을 잘 이끌어달라’고 하시더군요.”
이때부터 김진호 호떡은 기업화의 길로 들어섰다. 타임스퀘어 쇼핑몰, 여의도 IFC몰, 김포 롯데몰, 가산동 W몰 등 대형 쇼핑몰의 푸드코트에 매장을 내고, 호떡 명소로 자리잡았다. 오는 9월에는 인천공항 식당가에 매장을 내고 외국인들에게 호떡의 진가를 알릴 예정이다. 내달에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 시장조사차 다녀오기로 했다. 식품 대기업 실무진들과 함께 호떡 재료를 가지고 가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맛을 보게 한 뒤 품평회를 열어 중국시장 진출을 타진해볼 생각이다.
김 대표의 20년 호떡 인생 출발점은 1993년이다. 1969년생인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 인생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지만 직장생활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호떡의 달인으로 명성이 높던 기술자를 알게 됐다. 매일 담배 1갑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했다. 몇 달을 찾아간 끝에 승낙을 받아냈다.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라’며 스승은 무섭게 채찍질을 가했다. “반죽 만드는 기술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호떡 하나에도 장인 정신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게 스승님의 가르침이었지요. 그건 바로 가족만큼 호떡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어요. 내 자식에게 자랑스럽게 먹일 수 있는 호떡을 만들라는 것이지요.”
모든 맛있는 음식이 이런 원리로 만들어진다고 김 대표는 잘라 말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든 수제비나 칼국수가 왜 그렇게 맛있는 줄 아세요. 바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손맛에 담기기 때문이에요. 제가 만드는 수제 호떡도 반죽을 완성할 때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기계로 찍어내는 빵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2001년 스승의 품에서 떠나 남대문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이른바 ‘떡골목’ 입구에 3.3㎡짜리 매장을 차렸다. 처음 1년간은 예상외로 매출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종업원 마인드에서 오너 마인드로 바뀌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종업원이었을 때는 맛있는 호떡을 열심히 만들면 그걸로 충분했지요. 그러나 오너는 고객 눈높이를 맞추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미처 몰랐죠. 열심히 호떡만 만들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에게 눈인사라도 해야 내 상품이 팔린다는 사실이죠. 전통시장 먹거리 가게는 60% 이상이 단골고객인데, 떡골목을 오가는 손님들에게 눈도 안 맞추고 호떡만 굽고 있으니 누가 사가겠어요. 이걸 깨닫고 나서는 골목을 지나다니는 손님들에게 인사부터 건넸지요. 그다음부터 하루 500~700명까지 들르기 시작해 하루 매출이 100만원 이상 꾸준히 오르고 있습니다.”
김 대표는 2013년 ‘경기(景企)F&B’란 이름의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기왕에 호떡장사를 시작했으니 호떡을 주사업으로 하는 큰(景) 기업(企)을 일구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따른 결과였다. 한국 유일의 호떡 기업인 셈이다. 이 회사에는 30여명의 정직원이 일하고 있다. 대형 쇼핑몰과 병원 푸드코트 등에 흩어진 10여개 매장은 모두 직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가맹점은 하나도 없다.
가맹점을 내주면 단기간에 기업을 키울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했다. “가맹점주는 이익을 내기 위해 좀 더 싼 재료를 쓸 것이고, 그러면 맛이 달라지지요. 맛을 제멋대로 변형하면 소비자들의 평판이 나빠져 결과적으로 이미지가 추락할 수밖에 없어요. 돈을 벌려고 그렇게 하는 건 우둔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 호떡, 어떻게 탄생했나
가난한 中 노동자의 값싸고 간편한 먹거리
호떡의 호(胡)자는 오랑캐를 뜻한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병자호란의 ‘호’도 같은 의미다. 떡의 명칭을 봐서는 전통음식이 아니라 중국인에게서 유래된 음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위키백과에는 우리나라에서 호떡의 역사가 시작된 건 일제시대인 1920년대라고 기술돼 있다. 1927년 봄부터 매일 1000명이 넘는 중국인 노동자(쿨리)가 인천에 상륙했다. 쿨리는 ‘집단 채무 노예’ 또는 사실상의 노예로서 ‘아무 일에나 투입되는 중국인 또는 인도인 노동자’를 지칭하는 데, 이 말은 힌두어의 ‘Kuli’(날품팔이)에서 유래했다.
쿨리들이 한국에 대거 유입되자 당시 한국에 정착해 있던 화교들이 이들을 상대로 값싸고 만들기 간편한 음식을 개발했는데, 이 음식이 ‘호떡’이라고 불렸다. 원래의 이름은 ‘화소(火燒)’ 또는 ‘고병(枯餠)’이었지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지나빵(支那パン)’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영문 이름은 ‘Chinese Pancake’다. 쿨리가 많은 곳에는 어디에나 호떡집이 있었고, 호떡집에 쿨리들이 북적거린다는 뜻으로 ‘호떡집에 불났다’는 속어도 생겨났다.
호떡은 설탕을 핵심으로 하는 속을 흰 떡이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통 계피맛이 나는 흑설탕을 넣지만 요즘엔 흑설탕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밀가루를 첨가하거나 땅콩 등의 견과류를 갈아 넣어 점성을 높이기도 한다. 호떡의 떡은 보통 흰색이지만 녹차가루를 넣어 녹색인 녹차호떡으로 만들 수 있다.
속에는 설탕, 이스트, 견과류 등이 들어가며 반죽은 밀가루, 찹쌀가루, 우유, 소금 등으로 만든다. 호떡 맛은 속이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호떡을 오래 만들어온 사람들은 반죽이 관건이라고 잘라 말한다. 반죽이 쫄깃하고 맛있으려면 밀가루에 함께 섞는 찹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글=강창동 유통전문기자 cdkang@hankyung.com
사진=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