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좋아하는 애들이 별거 있나? PC 갖고 밤새울 장소만 있으면 되지.”

동영상 소프트웨어 ‘곰플레이어’로 유명한 그래텍 창업자인 배인식 의장(국민대 금속공학·86학번)은 학창 시절 전국대학컴퓨터서클연합(유니코사) 회장이었다. 배 의장은 “각 대학 컴퓨터 동아리마다 숨어 있는 괴짜들이 많았다”며 당시 86학번 친구들을 떠올린다.

국내 인터넷·게임업계 창업자 가운데는 유독 86학번이 많다. 배 의장뿐만 아니라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등이 1986년 대학에 입학했다. 또 있다. 바로 최근 카카오와 다음의 ‘깜짝 합병’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도 86학번이다.
주식 ‘1조원 클럽’ 1~3위 86학번

국내 정보기술(IT)업계를 주무르고 있는 이들 86학번 창업자는 ‘신흥 재벌’로도 떠올랐다. 김 의장은 카카오·다음의 합병으로 주식 보유가치가 1조6427억원 수준으로 치솟았다. 김 의장이 직접 보유한 카카오 지분 29.9%(808만3800주)와 그가 100% 소유한 케이큐브홀딩스의 카카오 지분 23.7%(639만8830주)를 더해 합병가액(11만3429원)을 곱한 수치다.

김 의장은 단숨에 김정주 회장(1조7392억원)에 이어 자수성가형 IT 주식 부자 2위에 올랐다. 김 회장과 김 의장에 이어 이해진 의장(1조1908억원)도 주식 ‘1조원 클럽’에 들어 있다. 신흥 IT 부자 1~3위가 모두 86학번인 셈이다.

한게임과 카카오를 만든 김 의장은 서울대 산업공학과 86학번이다. 대학 입학 때 재수를 해 이 의장(서울대 컴퓨터공학)보다는 한 살 위다. 넥슨 창업주인 김 회장(서울대 컴퓨터공학)은 국내 최초의 그래픽 기반 온라인게임인 ‘바람의 나라’의 개발 주역이다. 이 의장과는 1991년 대전 KAIST 대학원 재학 때도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한 인연이 있다. 룸메이트였던 친구가 각각 국내 인터넷과 게임 업계의 최대 기업을 세운 것이다.

이들의 옆방에는 송재경(엑스엘게임즈 대표·서울대 컴퓨터공학 86학번)과 김상범(넥슨 이사·KAIST 전산학 86학번)이라는 두 천재 동기생이 같은 방을 쓰고 있기도 했다. 송 대표는 ‘리니지’를 만든 국내 최고 흥행 개발자이고, 김 이사는 넥슨 초기 멤버로 ‘메이플스토리’ 등을 만들었다. 1991년 KAIST에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천재 청년 4명이 동고동락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울대-KAIST 인맥은 아니지만 다음을 창업한 이재웅 전 대표는 연세대 컴퓨터과학과 86학번이다. 이 전 대표는 경쟁사인 네이버의 이 의장과 동네 친구다. 서울 청담동 한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았던 인연이 있다.

PC가 보급되던 시기와 맞물려

한국 인터넷 시장에서 86학번이 떠오르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배 의장은 “아마도 86학번이 PC를 접해 보기 시작한 최초의 학번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KAIST는 1990년대 초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초적 수준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PC를 설치했다.

김 이사는 “기숙사에서 컴퓨터 갖고 이것저것 해보던 최초의 학번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우리가 한 시도는 전부 최초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자오락실 게임을 즐기다 PC라는 새로운 기기를 만났고, PC통신과 인터넷을 경험하기 시작한 세대가 86학번이란 뜻이다. 게다가 이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6~7년 뒤인 1999~2000년 벤처 창업 붐이 일면서 인터넷·게임업계에는 스타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구글의 에릭 슈밋,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모두 1955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특정 세대의 IT업계 주도는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다”며 “86학번 천재들이 같은 시기에 학교에 다니며 시너지를 내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