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승소는 ‘피로스의 승리’다.”

삼성전자와 애플 간 2차 특허 소송 배심원 평결에 대한 외신들의 평가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지방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감당하기 힘든 손실을 입어 결국 패망했다. 손해배상액을 보면 애플이 삼성전자에 승소했지만 ‘실속 없는 승리’였다는 것을 빗댄 표현이다.
삼성 특허 첫 인정…안드로이드, 반격 기회 잡아
애플은 당초 삼성전자에 요구한 배상액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배상액을 받게 됐다. 애플이 이번 소송에 쓴 비용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금액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미국 내에서 삼성전자 제품 판매를 금지시키려는 애플의 목적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삼성, 상용특허·구글 내세워 반격

삼성 특허 첫 인정…안드로이드, 반격 기회 잡아
애플은 2차 소송에서도 1차 소송과 비슷한 전략을 썼다. 삼성전자를 ‘카피캣(모방꾼)’으로 몰아세우는 전략이다. 그러나 1차 소송에서 패한 삼성전자는 전략을 바꿔 반격에 성공했다.

먼저 1차 소송에서 내세운 ‘표준특허’를 버리고 ‘상용특허’를 앞세웠다. 표준특허에는 이른바 ‘프랜드(FRAND)’라고 불리는 원칙이 적용된다. FRAND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인(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이라는 말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표준특허일 경우에는 특정 기업을 따돌리지 말고, 누구에게나 사용 허가를 내줘야 한다는 뜻이다. 애플 외에 삼성전자의 특허를 싼 값에 쓰고 있는 기업이 하나라도 있을 경우 애플에 거액의 배상을 물리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구글을 끌어들인 것도 주효했다. 2차 소송에서 애플이 침해했다고 주장한 특허 기술이 삼성전자의 휴대폰뿐 아니라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채용한 다른 제조사의 휴대폰에도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애플 모두 구글 관계자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삼성 대 애플’이 아니라 ‘구글 대 애플’의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미국 배심원단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둘 다 패자’라는 분석도

삼성전자와 애플 두 회사 모두 소송을 통해 기업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송 과정에서 두 회사의 경쟁사 분석과 마케팅 전략, 내부 이메일 등이 공개된 탓이다. “구글 안드로이드와 성전에 나서겠다”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발언이 공개됐고, 삼성전자의 한 임원이 2011년 잡스의 죽음을 마케팅 기회로 삼기 위해 계획을 세운 사실도 알려졌다.

두 회사가 혁신적인 제품 개발에 쓸 에너지를 소송전에 허비하는 동안 화웨이 레노버 등 중국 업체들은 성장의 발판을 닦았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2012년 1분기 55%를 웃돈 애플과 삼성전자의 합산 시장 점유율은 올해 1분기 47%로 떨어졌다. 특허 전문가인 브라이언 러브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클래라대 법학과 교수는 “애플은 안드로이드 확산을 막기 위해 소송전을 시작했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 판결은 연말께 나올 듯

미국의 사법제도는 배심원제가 근간이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이 평결을 내리면 재판장이 양쪽의 이의 제기 절차를 거쳐 최종 판결하는 구조다.

배심원단의 이번 평결은 5일(현지시간) 최종 확정된다. 지난 2일 평결 직후 애플 측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특허 침해 판단을 받은 ‘단어 자동 완성’과 관련해 갤럭시S2 기종의 배상액이 ‘0’으로 적혀 있는 점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갤럭시S2는 미국 내 주력 제품이 아니어서 재산정해도 배상액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재판부의 판결은 연말께 나올 전망이다. 1차 소송에서는 배심원단이 평결한 이후 재판부 판결이 나오기까지 1년 이상 걸렸다. 그러나 2차 소송은 진행 속도가 빨라 판결까지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1차 특허 소송은 삼성전자가 애플에 9억3000만달러(약 9574억원)를 배상하도록 하는 판결이 나온 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